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울로 코엘료 지음 / 임두빈 옮김



불특정 다수의 면전에 대놓고 설교-그것도 지독히 현학적인 동시에 감각적인-하기를 즐기면서도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이 여기 있고, 우리는 그를 '브라질의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잘 팔려나가는 작가들 중에서 파울로 코엘료는 녹록치 않기로 따지면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 이유는 평생을 두고 보아도『어린 왕자』의 내용이 볼때마다 새롭다는 유명한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파울로 코엘료가 꽤나 노련한 "멘토"이기 때문에, 그의 책이 제시하는 이정표는 아무리 퍼내도 메마르지  샘물처럼 달콤하고 풍부하다. 책 시장에서는 언젠가부터 '스토리'에 공세에 밀려 '교훈'이 숨을 죽이고 엎어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기에 파울로 코엘료의 선전이 더욱 의미가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를 통해 전세계 수 많은 이들의 영혼을 울려대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순탄치 않았던 그의 성장기가 얼마나 많은 보물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는지는 그가 쓴 작품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그것들은 하나같이 소설과 에세이, 처세서의 경계점에 교묘하게 걸터앉아 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문장을 아름답고 쓸모있게 세공하는 기술 뿐이었다. 원석은 이미 그가 글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그의 인생 속에 촘촘히 박혀있었다.


이 글을 쓰던 당시 육십을 맞은 그가 자신의 내부에 숨어있는 여성성과 자비로움을 책으로 잉태한 것은 사실, 그간의 역사가 그녀들에게 자행해왔던 수많은 속박과 그릇된 편견들을 하나둘씩 거꾸러뜨리고 있는 여성들의 출현에 비하여 시기적으로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직도 남아 있는 여성성에 대한 편견과 뿌리깊은 부조리를 걷어내는 문학적인 무기로서의 제 몫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여성단체에서 회원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장하고 있지만, 이 책에 "패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 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이다.(실제로 파울로 코엘료도 이 책 전체-후기도 포함하여-에서 패미니즘이라던가 여성의 권익이라는 말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은 아직도 마녀를 혐오하는-혹은 두려워하는- 대다수의 남성이-혹은 소수의 여성이- 읽어야 할 듯하다. 이제 우리 모두가 마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들의 권능을 인정할 순간이 온 것이다.

"나에게 마녀란 직관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여성,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여성,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이다."


그 외의 이야기(Click)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둠의 저편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임홍빈 옮김


조금이나마 독서에 경험이 쌓이고 나면, 작품만큼이나 작가에 대한 관심이나 평가를 욕심내게 된다. 이를테면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이러이러하고, 박민규의 스타일은 이런 식이고, 폴 오스터의 소설에는 이런 특징이 있다- 하는 식이랄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손에서 나온 글은 어떤 종류의, 어떤 내용의 것일지라도 절대 어색하지 않을 듯"한 작가다.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기보다는 '글'이라는 것 전반에 뛰어난, 이를테면 딱히 이거다 하는 레퍼토리는 없지만 한식, 일식, 양식 등등을 모두 섭렵한 요리사의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독자와 서술자를 하나의 '점'에 녹여 방관자로서 소설에 참여시키는 동시에 소설에서 배제시키는 카메라 기법의 독특함은 차치하고서라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등장 인물들처럼, 이 책의 출연진들도 모두가 하나의 알레고리로 활약한다는 것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내가 아는 하루키의 매력은 이렇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한 작품 속에서 너무도 많은 말을 한다. 그래서 그 수많은 말들을 총합적으로 묶어다가 하나의 결론을 내보고자 덤벼들면 결국 무엇도 얻기가 힘들다. 소설의 주제보다, 구절 속에서 내게 느껴지는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 어찌보면 더 수지맞는 장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 그에게서 무언가 한 마디의 아름다운-혹인 잔혹하지만 진실인-이야기를 건네받는다. 도저히,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가 없다. 이 『어둠의 저편』에서도 역시 하루키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와 달리, 두 번째의 독서 후 내가 집어든 이야기는 이렇다.

하루키가 '가면의 남자'와 '시라가와' 그리고 '마리'와 '다카하시'처럼 인물상에서 대립각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캐릭터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모두가 욕망의 주체인 동시에 욕망의 객체- 누군가를 쫓는 사냥꾼이 되는 동시에 동시에 누군가의 총구를 피해 달아나야하는 사냥감 역할까지 맡아야 하는 운명이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매춘과 폭행을 저지른 시라가와가 벌을 받지 않는 것도,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다카하시와 편의점 점원이 은색 핸드폰 너머로 중국 갱단에게 위협적인 경고를 받는 것도, 모두가 욕망의 양면을 씨앗으로 품고 태어난 인간의 운명인것이다. 누가 그 사슬에서 풀려 날 수 있을까? 그 전장에서 벗어난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에는 말이다. 결국에는,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모두 똑같은 종잇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야,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 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불의 입장에서 볼때는 어떤 것이든 모두 종잇조각에 불과해. 그것과 마찬가지야. 중요한 기억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억도, 쓸모 없는 기억도, 구별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는 그저 연료일 뿐이지. - p 235.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흑소소설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이선희 옮김


문학을 이용한 꼬집기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는 것 같다. 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생각해보면 아마 "아프게 꼬집기" 혹은 "슬프게 꼬집기" 보다는 "우습게 꼬집기"가 좀 더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웃음 한 방으로 세상을 뒤집다!" 라는 이 '웃음 3부작'의 캐치프레이즈는 사실 그리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

독소소설』,『괴소소설』,『흑소소설』세 권을 모두 다 읽었지만 사실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내 읽기가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겠지만,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해봐야, "보통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눈물나게 재미있다" 라는 역자의 후기는 아무래도 오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물론 작품 옹호론자들의 가장 유치하고 저급한 "발끈 리플" 중 하나인 "니가 써봐라, 지는 얼마나 잘쓰길래?"라는 식의 어택에는 찍소리 할 기운도 의욕도 없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웃음 3부작'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를 처음 접하는 것은 그의 진가를 아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책 뒷표지에 확실히 써 있지 않은가. "미스터리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의 놀라운 변신!" 미스터리의 거장인지 아닌지, 이 변신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차차 확인해 볼 일이지만, 거장 씩이나 되어도 따로국밥 말기가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는 것은 확실히 느꼈달까.

확실히 '웃음 3부작'은 그럭저럭 재미있고 또 그럭저럭 잘 꼬집어 댄다. 하지만 꼬집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확실히 어딘가 부족.결국 이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커트 보네거트'를 읽기로 결심했다.


결론 '웃음 3부작'은 전체적으로
1. 읽는 것은 말리지 않음.
2. 구매 및 소장은 확실히 비추.
3. 그나마 그 중에서는 『흑소소설』이 제일 나은 듯도.



근데, 왜 서평이 이따위로 밖에 안써지는걸까.
내 문제? 아니면 책 문제?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자 대 남자 / 장폴 뒤부아 지음 / 김민정 옮김


누구나 거친 파도 속에 양발을 담그고 산다. 강한 남자는 없다.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나를 떠난 아내가 선택한 남자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상대에 따라 섹스 중에 필요 이상의 야수가 되기도 하고 주눅이 들기도 한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하루를 불평으로 낭비하기도 하고, 자신이 타인보다 태생적으로 모자란다는 점을 사실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과장스러운 방법으로 그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비단 남자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남자 대 남자』는 막강한 비유로 짜여진 수작이다. 폴 아셀방크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눈보라 속을 헤치며 어딘가에 서서 눈에 묻혀있을 자신의 차를 향해 약을 가지러 가는 도정은 그대로 인생의 은유다. 결국은 뜻대로 약을 찾지 못하고 몸에 묶여 있는 줄을 되감으며 오두막으로 돌아 왔을 때, 줄은 계단 난간에 감겨 있었고 그 줄을 굳건히 붇잡고 있어주리라 믿었던 이는 오두막 안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는, 그 상황이야말로 감히 삶이라 하겠다.


안나는, 어디에 있을까? 폴에게, 패터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악마와 미스 프랭 / 파울로 코엘료 지음 / 이상해 옮김

대개는 이런 식이다. 한 사람이 있고, 양심과 이득을 저울질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갑자기 그의 머리 좌측에서 그와 똑같은 얼굴의 쪼그만 악마가 뿅! 하고 나타나서 그에게 말한다. "눈 딱 감고 그냥 저질러 버려. 아무도 몰라, 설사 안다고 해도 누구도 너를 비난하지 못할 걸? 다들 이런 상황에서는 똑같이 할 테니까." 주인공이 그 미니사이즈 악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우측에서 뿅하고 하얀 옷을 입은 미니사이즈 천사가 등장한다. 그 천사도 주인공의 얼굴을 하고서는 "안돼,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 지금 당장은 좋을 지 몰라도, 분명 나중에 두고두고 오늘의 잘못을 후회할 거야." 라면서 틀어말리기가 일쑤다. 여기까지가『악마와 미스 프랭』에 쓰여진 내용 전부이다. 다만 이런 방식의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양상을 조금 더 길고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 작품은 조금도 유치하거나 식상하지가 않다.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이 항상 품고 있는 "환상성"은, 그리고 그 환상성으로 인해 피어나는 "모호함"은 언제나 그랬듯, 역시 파울로 코엘료야, 하는 감탄을 이끌어 낸다. 마치 『어린 왕자』처럼 읽는 이에게 다양한 생각의 가지를 제공하여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파울로 코엘료의 재주다.

그의 작품이 항상 기분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동화처럼 주제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표지판이 잘 깔려 있는 도시의 거리를 거니는 것처럼, 또한 언제나 해피엔딩이라는 것.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 : 리브로

<괴소소설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이선희 옮김>


"웃음 3부작"을 마무리하는 괴소소설.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독소소설』에 이어 두 번째로 웃음시리즈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이 단편들의 매력은 허무맹랑한듯 하면서도 현실의 이면을 제대로 꼬집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다. 어쩐지 근래에는 우연히도 풍자적인 책들만 보고 있는 듯도 하지만 어찌됐든 시니컬보다는 코믹하게 현실을 할퀴는 쪽이 내 개인적인 취향이다.

읽은 순서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독소소설』보다는 『괴소소설』이 모든 면에서 더 나은 것 같다. 즐거움도, 독성도. 하지만 아무래도 내 결론은 "웃음 3부작"은 모두가 서재에 꽂아놓고 두고두고 읽을 만한 것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쿄 타워 /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


윤(倫)과 불륜(不倫)의 멍에와는 상관없이, 사랑은 그저 사랑인가 보다. 외양간의 황소가 멍에를 쓰고 들에 나와도 여전히 황소이듯이.

요즘의 독서가들의 내공이 얕지 않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소심한 나는 위의 한 줄을 적어 놓고 두 가지가 두렵다. 내가 불륜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두렵고, 에쿠니 가오리가 도쿄 타워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두렵다. 그래서 이야기하자면,

엄밀히 말해 네 명의 주인공들은 불륜중이지만, 다른 이야기들 속의 불륜자들 처럼 세상에 생채기를 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누구도 탓하지 않는(물론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에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이며, 흉터가 남는 것은 그들의 가슴 뿐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애절할 수 있다. 오히려 구속이나 동거 따위를 다 걷어냈기 때문에 서로의 몸과 마음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사랑. 소설 속에는 불륜으로 인해 벌어지기 십상인 드잡이나 애증의 트라이앵글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갈망이나 질투 따위의 보편적인 요소를 다 지닌 또 다른 형태의 일반적 사랑인 듯하다. 때문에 기다림이나 함께함에 대한 구절들에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에쿠니 가오리를 싫어했던 나는, 이제 그녀의 글이 가지는 힘을 이렇게 해석하려 한다. 자칫 무겁게 다뤄지기 쉬운 이야기들이 감정이라는 섬세한 표면위로 흐르기 위하여 체중을 줄인다- 가벼운 것은 에쿠니 가오리의 매력이다. 깊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향한 통로를 넓게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글은 부드럽게 읽혀나간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숨겨진 메타포나 알레고리를 발견하고 또 이해해야 하는 독서에 지친 독자들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에서 조금 더 직접적이고 감정적에 기반한 카타르시스를 만날 수 있다. 사막은 사색을, 오아시스는 휴식을 선사한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에 입각한 편견일 수도 있다.      

왜 책의 제목은 도쿄 타워일까. 이유를 그럴 듯하게 써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나의 읽기도, 나의 쓰기도 아직 새파랗게 멀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 자크 아탈리


살면서 한번쯤 이런 질문을 허공에 던지곤 한다. "우리는, 혹은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향해 가는가?" 많은 성현들이 그 해답을 위해 고심하였고 각자의 철학을 정리해 세상을 견인해왔다. 하지만 그 중에 무엇 하나도 한 줄 짜리 인생을 위한 지배적인 정답은 되지 못한다. 결국 누구도 우리의 출발지와 도착지를 정확히 알 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 어려운 문제 속에 누구나 알 수 있는 하나의 진리가 들어있다. 인간은 어딘가에서 '와서' 어디론가 '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말, 수레, 알파벳, 종교, 민주주의......인류의 모든 육체와 지성의 산물은 유목민들 즉, 노마드의 손끝에서 뻗어나와 그들의 경로를 통해 곳곳으로 퍼져왔다. 그들은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토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들에게 정착이란 죽음과 동의어였다. 그 움직임 속에 녹아 있는 무궁무진한 자유가 창의를 낳는다. 어디론가 떠날 필요는 누구에게나 항상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생존은 흐름 속에 안착한다. 19세기보다 20세기에서 더욱 그랬듯이, 20세기보다는 21세기에 우리는 더 분주히, 더 멀리, 더 많이 떠나야 한다. 고인 물은 썩는다. 물 뿐이 아니라 인간이나 사회와 같은 모든 물리적, 개념적 유기체는 정지하는 순간 죽음을 향한 초읽기에 들어간다. 정착의 순간적인 안락함에 안도하지 말자, 방심하지 말자. 죽음은 내부에서 새어나올 수도, 외부에서 스며들 수도 있는 관념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강의
신영복 지음/돌베개
          젠체하고 싶어서 몇 권의 동양 고전에 손을 댔던 적이 있습니다. 논어나 맹자, 대학 등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목만 겨우 기억할 정도로 재미 없었고 머릿속에 남은 것도 하나 없습니다. 고전 자체에 흥미가 있었다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읽은 것이 아니었으니 그럴 밖에요. 그때 다시는 이런 책들을 손에 잡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시간낭비라고요.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당장이라도 도서관에 달려가 논어, 맹자, 노자, 장자 가릴것 없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데로 뽑아오고 싶은 기분입니다.
 
           제자백가들이 사상을 피력하고 난세를 마무리짓기 위해 종횡하던 그때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사이에는 이천년이 넘는 시간과 훨씬 넓어진 세상이 가로놓여져 있습니다. 그런 탓에 오늘날 이런 옛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는 것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읽었다고 해서 현실에 적용시켜 진보를 추구하기에도 그 내용이 좀 동떨어져 있는 감이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이런 경서들의 위상은 점점 이끼낀 골동품의 자리에까지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고전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분들께서 이러한 고전들이 현존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의 해결책 역할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계시지만, 그런 메시지들조차 자칫 사변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입니다. 다수의 일반대중들-특히 젊은이들-에게 있어 이런 고전이나 철학의 영역은 연구자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책의 가치가 빛납니다. 이 책은 "관계론적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해석하기를 주장하면서 자칫 낡고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지기 쉬운 내용들을 더욱 친숙하고 현실감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당면과제들에 대한 대응자세를 좀 더 직접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존댓말로 서술되어 있어 고전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역시 신영복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철학사상에 관련된 지식이 전혀 없는 이가 읽기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한정된 분량 탓에 넓은 내용을 얕게 다루는 많은 교양서들이 비해,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들을 짚어 깊이 있게 해설하면서도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는 것 또한 이 책의 매력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이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1. 동양고전을 읽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2. 고전을 읽어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다.
3. 공자왈 맹자왈 이런 것들은 현실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오래된 사상일 뿐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
조엘 레비 지음 / 서지원 옮김
358p / 휴먼앤북스


큼지막한 인물들이 벌이는 굵직굵직한 사건들만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아니라는 것. 시대의 뒷편에서 아무도 모르게 부를 위해서, 혹은 이상을 위해서 암약하는 음모가, 첩보원들의 이야기는 비록 그것이 확실한 것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재미있는 읽을거리임에 틀림없다.

워낙 이쪽 방면으로는 관심이 없었던지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거나 심심한 감응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소위 "음모이론가" 들의 구미를 충족시켜줄 만한 재미가 다분했다.

하지만 흥미 본위의 책이 지니는 단점이 다 그렇듯이, 읽고 나서는 남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오히려 100% 허구인 소설을 한편 읽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경험치를 쌓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런 사실이 안타까워 항상 이런 장르의 책을 읽는것이 망설여진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리 위의 룰루
폴 오스터 지음 / 김경식 옮김
302p 열린책들

하나의 작품은 이야기와 매체의 결합에서 태어난다. 이야기는 사실상 무수하고 그것을 실어 나르는 매체 또한 다양하며 또 앞으로도 더욱 풍부해질테니 그 조합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할 것이다. 그런 작품 하나하나가 다들 가치와 특색을 가지겠지만 모든 이야기는 각각 거기에 어울리는 표현 방법이 있는 듯 하다.

만화나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화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런 리메이크가 항상 칭찬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제작자의 역량에 달린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이야기가 어떠한 매체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판단하는 능력에도 크게 좌우된다.

폴 오스터는 <다리 위의 룰루>의 가닥이 잡혔을 때 그것을 시나리오 형태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이유로 중도에 집필을 그만뒀으나, 룰루는 계속 그의 머릿속에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룰루를 소설로 옮기기로 마음먹고 몇 달간 덤벼들었으나 스스로 룰루는 시나리오를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룰루는 애초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다리 위의 룰루>는 도서관 5층 인문과학실이 아니라 3층 체육예술실에 비치되어 있었다.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책을 빌려 오는 것이 망설여졌다. 더 이상 폴 오스터의 소설은 읽을 것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작가로 옮겨갈까 아니면 시나리오들도 마저 읽을까를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이 책을 뽑아들었다. 그렇게 망설였던 이유는 <빵굽는 타자기>에 실린 그의 초창기 희곡 두 편이 엄청나게 지루했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리 위의 룰루>는 상당히 "폴 오스터"적인 시나리오임에 틀림없다. 작가 인터뷰에서 그가 룰루는 소설로 탄생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나리오는 상당히 소설스럽다. 재즈 클럽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던 중 아무 상관도 없는 이가 쏜 총격에 맞아 평생 그가 유일하게 몰두할 수 있었던 음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주인공 "이지".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배회한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마법의 돌". 그 돌의 힘으로 이지는 처음 본 "실리아"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의 짧고 뜨거운 사랑은 불의의 사건에 의해 흩어진다. 더욱 슬픈 것은 이 모든 것이 총에 맞고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가는 도중 끝내 죽어버린 이지의 마지막 상상이라는 것. 그리고 실제로는 그와 사랑을 나눈 적이 없는 실리아가 죽은 이지를 싣고 떠나는 구급차를 바라보며 성호를 긋는 마지막 장면.

이 책을 읽고 나면 왜 폴 오스터가 이 글을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로 만들 수 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의 스틸 사진처럼 머릿속에 감겨오는 그 짧은 감동.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