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4/05 어떤 새벽의 뒤에도 아침은 온다 :: 『어둠의 저편』 by Syo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둠의 저편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임홍빈 옮김


조금이나마 독서에 경험이 쌓이고 나면, 작품만큼이나 작가에 대한 관심이나 평가를 욕심내게 된다. 이를테면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이러이러하고, 박민규의 스타일은 이런 식이고, 폴 오스터의 소설에는 이런 특징이 있다- 하는 식이랄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손에서 나온 글은 어떤 종류의, 어떤 내용의 것일지라도 절대 어색하지 않을 듯"한 작가다.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기보다는 '글'이라는 것 전반에 뛰어난, 이를테면 딱히 이거다 하는 레퍼토리는 없지만 한식, 일식, 양식 등등을 모두 섭렵한 요리사의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독자와 서술자를 하나의 '점'에 녹여 방관자로서 소설에 참여시키는 동시에 소설에서 배제시키는 카메라 기법의 독특함은 차치하고서라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등장 인물들처럼, 이 책의 출연진들도 모두가 하나의 알레고리로 활약한다는 것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내가 아는 하루키의 매력은 이렇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한 작품 속에서 너무도 많은 말을 한다. 그래서 그 수많은 말들을 총합적으로 묶어다가 하나의 결론을 내보고자 덤벼들면 결국 무엇도 얻기가 힘들다. 소설의 주제보다, 구절 속에서 내게 느껴지는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 어찌보면 더 수지맞는 장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 그에게서 무언가 한 마디의 아름다운-혹인 잔혹하지만 진실인-이야기를 건네받는다. 도저히,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가 없다. 이 『어둠의 저편』에서도 역시 하루키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와 달리, 두 번째의 독서 후 내가 집어든 이야기는 이렇다.

하루키가 '가면의 남자'와 '시라가와' 그리고 '마리'와 '다카하시'처럼 인물상에서 대립각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캐릭터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모두가 욕망의 주체인 동시에 욕망의 객체- 누군가를 쫓는 사냥꾼이 되는 동시에 동시에 누군가의 총구를 피해 달아나야하는 사냥감 역할까지 맡아야 하는 운명이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매춘과 폭행을 저지른 시라가와가 벌을 받지 않는 것도,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다카하시와 편의점 점원이 은색 핸드폰 너머로 중국 갱단에게 위협적인 경고를 받는 것도, 모두가 욕망의 양면을 씨앗으로 품고 태어난 인간의 운명인것이다. 누가 그 사슬에서 풀려 날 수 있을까? 그 전장에서 벗어난 인간은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에는 말이다. 결국에는,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모두 똑같은 종잇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야,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 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불의 입장에서 볼때는 어떤 것이든 모두 종잇조각에 불과해. 그것과 마찬가지야. 중요한 기억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억도, 쓸모 없는 기억도, 구별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는 그저 연료일 뿐이지. - p 235.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S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