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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 요시다 슈이치 지음 / 권남희 옮김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며 사는 건 아닐까요? 허락도 없이 상대방에 대해 하나의 결론을 지어놓는 순간, 정확히 그만큼 우리는 그 사람의 본질에서 멀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일까?' 하는 식의 답도 없고 대가도 없는 고민따위로 시간을 낭비하려 하지 않아요. 아무렴 어때. 그 "아무렴 어때" 덕에 유니버스(universe)는 거짓말. 우리는 할 수 없이 멀티버스(multiverse)에 살고 있지요.

다섯 주인공은 동거자로서 전혀 문제가 없을만큼 사이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아무와도 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심지어는 자신조차도 잘 모르고), 자신도 다른 네 명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고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살아지니까요. 가장 마지막에 동거에 합류한 사토루는 이런 구도를 "맨션에서의 친구놀이"라고 표현하네요. 최고로 슬픈 놀이입니다. 그들이 사는 401호가 그대로 우리 사는 세상의 디오라마라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겠지요.


미라이는 많은 영화들 속의 강간 장면만을 편집해 모아놓은 120분 분량의 비디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토루는 그 비디오 위에 핑크팬더가 춤추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녹화해버립니다. 이 소설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왜 이 소설의 제목이 퍼레이드인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해주는 부분이지요.


흉한 강간 장면 위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되풀이해 녹화한 몇 마리의 핑크 팬더.
웃는 얼굴로 허리를 흔들며 춤추는 핑크 팬더들의 행진.


우리는 수 많은 핑크 팬더들의 핑크 팬더. 사이사이 보이는 강간장면이야말로 자신만이 아는 진짜 우리의 모습이지만, 세상은 결국 핑크 팬더들의 춤사위, 서로의 강간을 덮어버리며 끝없이 이어지는 표면의 퍼레이드. 슬퍼해야 할까요, 아니면 안도해야 할까요?


요시다 슈이치를 가장 사랑한다고 떠들고 다녔으면서 막상 그가 연애소설 전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천후 전방위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신선한 충격입니다. 동시에 요시다 슈이치의 능력은 특정한 주제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일상을 파고들어 뭐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소재를 건져올리는 것, 8라운드까지는 잽만 날려 읽는 이들을 방심 시켜놓고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소설과(또는 소설가와) 코드가 맞다는 이야기는 그 소설이 읽는 이가 마음의 근육으로 들어올리기에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딱 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설사 소설가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반복적인 책 읽기를 통해 마음을, 감성을, 생각을 튼튼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아령이 너무 무거우면 들지 못하고, 너무 가벼우면 근육은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이치 말입니다. 혹시 저 말고 또 요시다 슈이치가 자신에게 정말 딱 맞는 운동기구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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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 악어 / 마리아순 란다 지음 / 유혜경 옮김


특정한 책을 노리지 않고 목적없이 서가를 유유히 기웃거리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놈이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냥 쑥 뽑아드는 것이다. 도서관 서가에 꽂힐 만한 책이라면 어느 정도는 되겠지, 하는 뿌리 없는 안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좋은 책이 걸리는 것은 아닌데, 이번에는 대박이 났다.

구두를 먹는 악어라니! 타인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자신만의 악어를 지니는 병. 고립된 상황과 인간 관계의 절박함,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란다는 '악어병'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질병으로 명명한다. 크로커다일약, 크로커다을 좌약, 크로커다일 소다수를 아무리 먹어도 침대 밑의 악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찾아와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 전까지는.

『침대 밑 악어』는 통째로 하나의 유쾌한 알레고리다. 품고 있는 의미는 카프카의 『변신』과 유사한데, 카프카가 인간간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그로테스크함으로 무장하였다면 란다는 그런 정공법보다는 우스꽝스러움을 통해 에두르고 있다.  

『침대 밑 악어』는 작은 책이다. 일반 문고형식으로 찍어내면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을만큼 짧다. 그 속에 1000페이지에도 남기기 힘든 이야기를 눌러담은 마리아순 란다의 통찰과 재치가 욕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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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라희찬 / 주연 : 정재영


 수많은 연예인들이 나가면 고생인 줄 잘 알면서도 한 번 체험해 보려 애를 쓰는 이상하게 끌리는 프로그램, 강호동의 "무릎팍도사"는 애초에는 방송에서는 밝힐 수 없으리라 생각되어왔던 연예인들의 개인사를 캐내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욕구를 시원하게 긁어주며 인기를 모았다. 애초에는 그랬다. 회를 거듭할 수록 이상하게 변질되어 출연자들이 점차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가지고 출연하니, 저건 누가 봐도 자기 영화, 자기 드라마 홍보하러 나왔음이 훤하게 드러나는데 약발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오히려 장진 감독은 영화 홍보보다는 진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나왔을 것이다. 장진 감독이 세트장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오면서 "저, 여기가 무릎이 닿기도 전에....." 라고 말하자 무릎팍 도사 일당이 안 신나는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장진 감독의 무릎이 세트장에 닿기도 전에, 나는 이미 꿰뚫어보았다. "너, 영화 안 되서 왔지!" 장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TV에 등장하는 순간, 모두가 나처럼 무릎팍도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장진 감독의 영화는 장진의 네임밸류에 비해 안 팔리지만, 확실히 장진 각본의 영화는 재미있다.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웰컴 투 동막골,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그리고 바르게 살자. 장진표 코미디는 최소한 내게는 돈을 주고 영화관에서 볼 정도의 가치는 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돈 내고 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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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만 걷는 경찰, 정도만

 정재영은 실미도나 거룩한 계보에서 보여주었던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도 잘 어울리지만 코미디야말로 그에게 진정 딱 맞는 옷이라고 할 정도로 코믹하다. 물론 그 옷이 대부분 "메이드 인 장진"이라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울 수 있겠지만, 최소한 장진의 코미디를 표현하는데 있어 정재영만한 배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교통순경 정도만은 융통성이라고는 인질들을 실제로 묶는 대신 "포박"이라고 써진 종이를 몸에 붙인다거나, 비협조적인 인질을 강간하는 대신 인질 앞에서 팔굽혀 펴기를 한 다음 포스트 잇으로 "강간"이라고 써서 붙이는 정도밖에 없는 원리원칙형 인간이다. "후회하실텐데....." 모의 훈련에서 그에게 은행털이 역할을 맡기는 경찰서장 이승우에게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여덟 명을 모의로 사살하고 한 명을 모의로 강간하는 완벽한 은행강도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웃음 포인트는 곳곳에 널렸다. 은행털이 모의 훈련이라는 상황 자체가 가져다 주는 특이함과, 그 훈련이 의아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역할에 몰입하게 되는 인질들의 반응, 조연배우들의 은근하면서도 독특한 대사, 실제로 쏘는 대신 입으로 '빵' 소리를 내는 총, 그 빵 소리에 목에 '사망'이라는 종이를 걸고 바닥에 누워 시체 역할을 수행하는 형사들. 실제로 영화관에서는 스크린에 영화제작사 "필름있수다" 라는 글자가 뜨는 순간 웃는 관객도 있었다.

 한 해에도 많은 코미디 영화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코미디 영화라는 것을 무기 삼아, 영화 자체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으려 하지 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러닝 타임 동안 실컷 웃다가 가라고 종용한다. 마치 그게 코미디 영화의 미덕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의 내용없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관람료 7000원을 내고 아무 생각없이 웃고 나와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정말 나를 웃겨 준다면, 충분히 가치 있다 하겠다. 코미디 영화를 보며 티켓이 제 값을 하기는 쉽지가 않다.7000원을 내고 700원짜리 코미디 영화를 본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바르게 살자'를 보고 나오는 길에 이 영화는 정말 딱 7000원짜리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극찬이고, 이런 싸구려 극찬을 해야 하는 코미디 영화의 현실이 조금은 씁쓸하다.  


여담. 빛도 못 보고 사라져가는 영화가 부지기수인 시점에서, 사실 장진 감독은 그나마 잘 팔리는 축에 속한다. 어쩌면 무릎팍이 그에게 배부른 고민이라고 나무랐던 것이 명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장진 감독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 증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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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조차 포스터에는 이름밖에 못 올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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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임영성 / 출연 : 정준호, 김원희, 고은아, 임형준



 영화나 책에 관해서 글을 쓰다보면, 가끔씩 정말 "결론부터 말하면,"이라고 리뷰를 시작하고 싶은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대개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용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남는거 없다. 이런식으로 요약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결론을 말하고 나면 더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 지를 모르겠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글자 색을 바꾼 이유? 뭐 딱히.

 '애초에 킬링타임을 위한 영화'라는 부끄러운 면죄부를 얻으려면 최소한 영화가 관람객에게 티켓값 이상의 갑어치는 해야한다. 큰 웃음 몇번에 7000원에 달하는 관람료를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인자한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영화산업의 질적 발전을 저해한다. 아무 생각없이 웃고 싶다면 TV를 켜면 된다. 전기료에 몇 푼 얹어주면 한 주내 내내 무한도전을 볼 수 있다. 물론 돈 한푼 안내고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영화를 봐서 면목이 없다. 그래도.

  이 영화의 마지막 보루는 시종일관 '가족'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코믹한 요소들을 관통하는 큰 흐름이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것에 조금이나마 점수를 매기고 싶다. '사랑'이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판단하면 남녀 주인공이 이러쿵 저러쿵 하다 결국 결혼에 골인하는 개연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을 유도한 것은 '사랑'보다는 '가족'이었다.

 <어색하지만, Check point 두 개>
1. 김원희는 이제 무슨 연기를 해도 꽁트의 냄새가 난다. 점차 버라이어티 MC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그녀, 훌륭한 선택이다.
2. 최코디가 등장한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어어어어어이, 배달 나가는가부네, 오봉순이~" 그리고 10초후 그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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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코디, 절라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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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왕국 / 김경욱 / 372p


대하를 이탈한 역사 소설들의 행보가 주목할 만하다. 소설들은 시대를 노래하는 것에서 더 이상의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한다. 역사를 빙자한 개인사를, 통합적 시대의 격랑을 대신하여 개별적인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리심』이 그랬고 그에 앞서『칼의 노래』또한 그랬다. 이러한 조류는 반란이고, 곧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확고했던 역사의 입지를 흔들어 놓는다는 맥락에서 작품은 매우 흥미롭다. 부조리와 야만으로 가득찬 이교도의 나라에 표착한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은 네덜란드인인 화자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후예인 우리 독자들에게도 매우 신선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류의 '낯설게 하기'는 아직도 주효하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벨테브레와 에보켄, 데니슨이 표상하는 것은 간결하다. 세 인물을 나누는 기준은 새로운 세상을 마주대하여 원래의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는 투쟁의 정도이다. 데니슨에게 새로운 세상은 감옥이고 새로운 이름은 벽이다. 그리하여 그는 호랑이처럼 자신을 지키려 포효하지만, 결국 호랑이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고 에보켄은 그 벽 아래에 새로운 삶을 지어올리는 방향을 택한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교만을 던져버리고, 야만과 비과학 속에 존재하는 영혼의 대화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그는 껍질을 벗겨낸 온전한 자신의 알맹이를 지키고자 한다. 벨테브레는 다른 두 명의 주인공을 살피고 고뇌를 거듭하며 자신의 영혼이 가야할 항로를 신중하게 잡아나간다.

380년 전의 그 시대에는 국경이, 바다가 세상을 나누는 울타리였다면 지금은 매 시간, 모든 공간이 하나의 세상이다. 태어난다는 것이 이미 하나의 표류이고 인간은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다. 작가가 화자인 벨테브레를 영혼을 지키는 전장의 경계선 한가운데에 올려두었기 때문에, 벨테브레의 고뇌는 우리의 표류에 작은 부표가 된다. 『천년의 왕국』은 '역사소설'의 가면을 쓴 철저한 '현대소설'이다.        

노회한 작가는 자신의 색채를 쉽게 버릴 수 없지만 소설가 김경욱은 젊다. 긴 호흡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아 섬세하면서도 가팔랐던 그의 문장이 마치 김훈의 것 마냥 간결하고 묵직해진 것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하여 두 개의 이름을 양 손에 깃발처럼 들어올리고 전투에 임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너무도 선명하게 전달해왔기 때문이다. 주제가 문체를 우선하고, 작품이 작가를 우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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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 무라카미 류 / 한성례 역



인도에 있나요, 류.
30년이 지났네요. 당신의 플룻은 아직 소리가 나는가요.
그 미친듯이 비오던 날 우리가 헤매이던 밭은, 학교는, 활주로는 그대로인가요. 그 흉측한 전조등은 아직도 죄없는 어둠을 발가벗기고 있나요. 당신에게 목졸려 죽고 싶었던 그날, 살갗을 찔러대던 그 역한 도시의 심장은 아직도 세상에 회색 피를 돌리고 있나요. 당신이 보았던 그 검은 새는.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요. 그 시절 갈 곳을 몰라 하염없이 해메이던 우리는 사실 어디로 가고 싶었던걸까요? 헬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약들과 악취 나는 섹스파티를 통해 우리가 좇던 윤곽이 희미한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새, 우리를 훔치던 그 검은 새의 악마같은 혀를 우리는 진정 끊어내고 싶었던 걸까요?
지금에 와서, 그때 검은 새를 보았다던 류의 말은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해요. 우리는 그 시점에 이미 검은 새의 부리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길고 좁은 그 목구멍을 통해 한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지도. 류, 어떻게 생각해요? 지금 류는 어디에 있나요. 혹시 이미 검은 새의 뱃속에서 소화가 되어 버렸나요? 아니면, 결국 모든 영양소를 착취당해 어느 차가운 길바닥에서 구역질 나는 배설물로 굳어 있지는 않나요? 설마, 그 비좁고 어지러운 길을 거슬러 나와 끝내 그 검은 새를 죽여버리고 어느 어둡고 조용한 바에서 한잔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요. 류의 플룻, 그 음률 속에서 나는 인도를 보았어요. 인도가 아닌 다른 인도.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그 푸른색의.
 


P.S. 류, 당신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오늘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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