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7/12/02 11월의 이야기 [20071202] by Syo
  2. 2007/11/26 못난 지구를 부탁해 [20071126] by Syo (1)
  3. 2007/11/11 뱀파이어의 위로 [20071111] by Syo
  4. 2007/11/07 김선생전 [20071107] by Syo
  5. 2007/11/04 세상의 마지막 스위치 [20071104] by Syo
  6. 2007/11/01 나와 빈대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너 [20071101] by Syo
  7. 2007/06/23 침대 [20061208] by Syo


 "이거 팔고 남은 겁니다. 받아요."

 애시당초 가게에 내놓지도 않고 따로 챙겨놓았던 빼빼로를 건네자 떡볶이를 버무리던 선화씨의 손이 멈춘다.
 
 "예? 이걸 왜..."
 "어차피 날 지나면 쓸모도 없는 거에요. 얼른 받아요. 팔 아프니까."

 던지듯이 빼빼로를 그녀에게 안겼다. 엉겁결에 빼빼로를 받아드느라 놓친 그녀의 주걱이 떡볶이 속에 잠긴다.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이 깜찍하다. 서른을 넘긴 여자치고는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험한 작은 두 손. 그 부조화 속에 숨어 있을 그녀의 굴곡진 삶을 나는 보듬고 싶다.

 "거, 쓸데없는 생각은 마요. 11월 11일 아닙니까. 그래서 주는 겁니다."
 "11월 11일은 빼빼로 주는 날인가 봐요?"
 "꼭 빼빼로처럼 생긴 1이 네 개나 있는 날 아닙니까. 여직 그것도 모르고 살았습니까?"
 "죄송해요."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뭐가 죄송합니까. 착해 빠져가지고."
 "그게 아니라, 전 빼빼로 준비 못했는데."
 "됐어요. 팔다 남은거라니까. 그냥 장사 끝나고 먹..."
 "아! 여기 1 네 개 있네요!"
 
 순식간에 표정을 밝히며 그녀가 건넨 것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어묵 네 개였다. 예상 못한 답례에 당황하는 나를 그녀는 그 사랑스러운 웃음으로 바라본다.

 "선화씨, 금요일날 장사 안하죠? 저녁에 시간 되시면 저랑 저녁이나 하시죠."
 "아, 저..."

 양 손에 어묵 두 개씩 들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선화씨는 다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문선화, 이 썩을년! 돈 벌어 오랬더니 사내 새끼랑 놀아나?"

 한 손에는 소주병, 다른 한 손은 이쪽을 삿대질하며 비틀비틀 다가오는 쓰레기같은 그녀의 남편이란 작자.

 "씨발, 넌 뭐하는 새끼야?"
 "니 부인이랑 마주보고 장사하는 새끼다."
 "좆같은, 장사 끝났으면 꺼질 것이지 왜 남의 집사람이랑 노닥거려!"
 "집사람은 주구장창 집 구석에 처박혀 술 처먹는 니가 집사람이지."
 "뭐, 이 개새끼야?"

  어떻게 내 멱살은 잡았지만 그의 동공은 이미 풀려 있었다. 뿌리치려는데 선화씨가 얼른 달려와 우리를 떼어낸다.

 "여보, 이러지 마세요."
 "이 씨발년. 니가 꼬리쳤지! 너 같은 년은 패야 돼!"
 "아악!"
 "이 씨발 새끼야, 그만 안해?"

 이 미친놈을 바닥에 패대기쳤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다. 내 앞에서 선화씨를 때려? 오늘 죽여주마, 하고 양팔을 걷어부치며 그에게 다가서자 그녀가 가로막는다.

 "호영씨! 그러지 마세요!"
 "오냐, 씨발, 내 너희 년놈, 꼭 간통으로 쳐넣는다!"
 "이 새끼, 일로 안 와?"
 "호영씨!"

 온몸을 던져서 나를 떠말리는 그녀의 등 뒤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사라지는 그가 보인다. 당장 달려가서 패 주고 싶어도, 나를 잡아끄는 선화씨의 힘이 너무도 가냘퍼 오히려 뿌리칠 수가 없다.

 "미안해요."

 한동안의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연다.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얼굴에 멍이 들어있다. 어루만져 주고 싶다. 그 손, 잡고 싶은데.

 "미안해요, 호영씨."

 그 손, 손이 너무 잡고 싶은데.

 "금요일은 아무래도 안...호영씨?"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손이 내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얼굴이 가깝다. 가까이서 보니 주름이 꽤 있다. 아름답다. 얼굴의 멍 아래로 홍조가 어리는 그녀. 사랑한다. 사랑합니다, 선화씨.

 "선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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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야! 엄마 없는 김지구 어디 가냐!"
 
  우리 아빠가 그랬어. 애들이 지구 엄마 없다고 그러면 대답하지 말라구.
 
  "야, 김지구는 귀머거리에 벙어리다!"
 
  우리 아빠가 그랬어. 애들이 놀려도 먼저 화내지 말라구.
 
  "벙어리 김지구, 그러니까 엄마가 도망갔지!"
  "나, 벙어리 아냐!"
  "으아, 김지구 또 돌멩이 던진다! 너희 아빠한테 다 일른다!"
 
  아빠가 화내지 말랬는데, 애들한테 돌멩이 던지면 종아리 맞는댔는데, 그래도 지구 엄마 도망간 거 아니란 말야. 아름이 친구들아, 너희는 알지?
    
 
  -10월 23일-
 
  아름이 친구들아, 잘 지내니? 지구도 잘 있어.
  사실 지구는 잘 못 있어. 지구가 돌멩이 던졌다고 영석이가 아빠한테 일러서 종아리를 맞았어. 아빠는 또 술을 마시고 집에 왔어. 아빠는 지구한테 맨날 엄마 닮아서 속 썩인다고 보기 싫다고 말하지만, 지구는 아빠를 무척 사랑해. 아빠도 진짜로는 지구를 많이 많이 사랑하는데, 지구는 다 알고 있어. 맨날 잠꼬대로 지구 엄마, 지구야 부르거든.
  궁금한 게 있어. 아름이가 그랬는데, 너희 별나라 친구들은 밥 대신 흙을 먹는다면서? 정말 신기하다. 아름이가 너희와 친구가 되려면 지구도 흙 먹을 줄 알아야 된다고 그랬어. 그래서 지구도 흙 먹어봤는데, 배가 아파서 혼났어. 처음에는 다 그런 거래. 매일 조금씩 먹으면 언젠가는 나도 너희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아름이가 그랬어. 대신 꼭 아름이가 보는 데서만 먹으라고 그랬어. 흙 먹는 건 비밀로 하기로 아름이랑 약속했지만, 너희는 아름이 친구니까 괜찮을거야.
 
 
  -10월 25일-
 
  아름이 친구들아 안녕? 나 지구야.
  오늘은 애들이 나쁜 말을 했어. 아름이가 거짓말쟁이고 사실은 지구를 놀리고 있는 거래. 걱정 마. 지구는 그 애들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해. 아름이는 하나뿐인 지구 친구잖아. 그리고 아름이가 거짓말쟁이면 너희들도 진짜 없는 거잖아. 말도 안돼. 그치?
  별나라 친구들아. 얼른 어른이 되어서 너희를 만나고 싶어.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줘.
 
 
  -10월 30일-
 
  아름이 친구들아 안녕? 오랜만이야.
  아름이가 며칠째 보이지 않아. 애들 말로는 전학을 갔다고 해. 근데 나한테 말도 없이 아름이가 전학을 갈 리가 없잖아. 아마 내 생각에는 너희 별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급하게 돌아간 것 같은데, 아름이 거기 와 있지?  아름이한테 얼른 돌아오라고 전해줘.  
 
 
  -11월 10일-
 
  별나라 친구들아 안녕? 지구야.
  아름이가 하도 소식이 없어서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아름이가 전학 갔다고 말씀하셨어. 선생님은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인데, 그럼 아름이가 거짓말한 걸까? 우리 엄마도 지구 과자 사러 간다고 그랬는데. 아니지? 아름이 금방 지구한테로 돌아오는 거지?
  친구들아. 지구는 아름이가 보고 싶어.
 
 
  -11월 20일-
 
  별나라 친구들아. 지구야.
  아름이는 아직도 오지 않았어. 아름이 올 때까지 지구 혼자 몰래 흙 먹을려고 했는데, 영석이한테 들켰어. 영석이가 아빠한테 일러바쳐서 지구는 또 종아리를 맞았어. 이번에는 돌멩이를 던지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지구가 너희들과 친구 하는 게 싫은가봐. 아빠가 엄마 없이 혼자라고, 지구도 친구 없이 혼자였으면 좋겠나봐. 아빠가 미워. 그리고 엄마도. 모두 다 미워. 지구는 혼자야.
  아름이 친구들아. 나도 너희가 사는 별나라로 데려가 주면 안 돼? 아직 하루에 흙은 한 줌 밖에는 못먹지만, 그래도 데려가 주면 안 돼?
 
 
  -11월 23일-
 
  아름이 친구들아. 어디쯤 와 있니?
  지구는 지금 뒷산에 올라와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어. 벌써 삼일째 여기에 있어. 가져온 과자도 다 떨어지고 너무 추워. 배가 고파서 흙을 좀 많이 먹었더니 배탈이 났는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엄마가 보고 싶어. 아빠는 엄마를 못찾는다고 했어. 혹시 지구 엄마 거기 있니? 그렇지? 얼른 지구를 데려가 줘. 엄마도 만나고 아름이도 만나고 싶어. 응? 금방 올거지?
  지구는 너무 졸려워서 딱 한숨만 자고 일어날게. 그 사이에 어서 내려와서 별나라로 데려가 줘. 약속했어!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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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게 다 사장님이 뱀파이어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라마예. 와 우리가 돈 대신 피 받고 술 팔겠십니꺼."
 "진짜?"
 "진짜라카이."
 "에이,"
 "찍고."

 아, 차라리 자기가 모기라고 고백했다면 조금은 믿어줄텐데. 뱀파이어라는 양반이 복부비만에, 다크서클에, 게다가 "있지예, 사실 지가예, 뱀파이업니더." 라니. 믿으라는 건지 어쩌라는 건지.

 "사장님, 고향이 어디세요?"
 "갱남 밀양인데예."
 "원래 뱀파이어들 고향은 저기 뭐야, 유럽 어디 아니에요?"
 "그라마 손님 고향은 어디십니꺼?"
 "저는 서울 토박인데요."
 "아입니더. 손님 고향은 저 아프리카 어딜낍니더. 거서 최초의 인간이 티나왔다 카두마요."
 "......"
 "지는 마, 토종입니더."

 밀양 단감, 밀양 사과는 몰라도 순박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밀양 토종 뱀파이어라니. 저 어울리지 않게 폭넓은 지식은 또 뭐란 말인가.

 "뭔가 뱀파이어 이미지가 아니신 것 같은데......"
 "하하하, 그래가 지가 이래 장사하는 겁니데이. 누가 봐도 뱀파이어 같이 생긴 놈이 피 받고 장사 해 보이소. 되겠십니꺼? 지맹키로 이래 배도 든든하이 티나오고, 사투리도 구수한 놈이라야 인간들이 의심을 안 하지예."
 
 위장전술. 설득력 있다. 게다가 사장님을 보자니 그들의 작전은 완벽하다. 저런 뛰어난 두뇌를 지닌 뱀파이어라는 치들이 마음만 먹으면 인류따위, 손쉽게 멸망하지 않을까?
 어느새 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고 있는 스스로가 더욱 웃겼다. 하긴, 지금은 무슨 이야기라도 믿고 싶으니까.
 
 "음, 그러면 낮에는 못 다니시겠네요?"
 "와예, 요새는 썬크림이 하도 좋아가 잠깐 동안은 개안십니더."
 "혹시......사람도 물고 그러시나요?"
 "으은지예, 지들도 인자 마 티 안나게 살기로 맴 묵은지 한참 됐십니더. 이래 말하마 손님한테는 좀 이상할랑가 몰라도, 인간들 목에 이빨 꼽는 것도 적당하이 해야지, 뱀파이어 숫자 늘라봤자 결국 입만 늘고 밥그릇 숫자는 줄어드는거 아이겠십니꺼. 그라이깐에 이래 술장사 하는 거 아입니꺼. 돈 대신 피 받고 술 팔고."
 "사실 저는 무슨 적십자나 헌혈 협회 같은데서 나오신 줄 알았어요. 피 400ml에 술 400ml라니. 뭐 꼭 적십자 아니더라도 저 같이 돈은 없고 고민은 많은 놈들한테는 자선사업하시는 거에요."

 그렇다. 돈 없고 고민은 많은 것이 나의 문제였고, 나의 문제가 그러하다는 것이 그녀의 문제였다. 피 팔아 술 마시는 못난 놈에게 그녀는 이제 지쳤다는 문자 한 통으로 이별을 고하고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못난 놈은 그녀는 커녕, 그녀를 찾을 방법조차 찾을 능력이 없어 오늘 밤도 이렇게 피를 팔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허허, 안 문다 카는구마 와 이래 겁내십니꺼."
 "그게 아니라, 고민거리 기껏 술로 눌러놨는데 사장님 때문에 다시 들고 일어나잖아요."
 "음, 딱 보이깐에 손님, 실연당했지예?"
 "뭐야. 뱀파이어는 독심술도 해요?"
 
  '손님 얼굴에 다 써 있십니더' 라고 사장님의 웃는 얼굴에 다 써 있었다. 술이 다 떨어진 참이다. 아, 피를 좀 더 뽑을까, 하루에 두 번도 뽑을 수 있으려나,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찰나, 사장님이 손가락으로 다른 테이블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손님, 그라마 저쪽에 쟈는 어떻십니꺼?"
 "누구요, 저기 서빙 보는 분이요?"
 "예, 쟈가 그래도, 밀양에서는 묵어줬십니더. 쟈가 한번 웃었따 카마, 동네 머스마들이 전부 지~일질 흘맀다 아입니꺼."
 "저기, 그럼 혹시 저 분도......"
 "아, 예, 예, 맞십니더."
 "뱀파이어는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까딱 싸우다 물리기라도 하면요."
 "걱정 마이소. 그래도 쟈는 살밥도 잘 묵십니더."
 "예?"
 "살밥, 살밥."
 "쌀밥?"
 "예, 살밥."
 
 살밥을 잘 먹는다는 그녀에게서 인간적이지 않은 섹시함이 풍기는 듯 했다. 기왕 솔로 복귀 한 거, 한 번 들이대 봐? 주문을 받고 돌아서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그 수 많은 '머스마'들을 쓰러뜨렸다는 웃음을 나에게 날린다.
 두 쌍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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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께서 득용(得龍)이라는 존함을 얻으신 연유가 범상치 않다. 선생의 모친께서 선생을 잉태하셨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모친께서 툇마루에 나와 오수에 드셨는데, 꿈에 비늘이 영롱한 용이 나타나 우렁차게 울어대며 하늘을 유영하였다. 길조를 짐작하신 모친께서 용이 가는 길을 따라나서자 그 상서로운 용이 포목점 장씨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모친께서 황망히 꿈에서 깨어 포목점으로 발걸음을 하시니 아니나 다를까 장씨의 내자가 만삭이었다. 모친께서 장씨의 내자에게 자초지종을 이르시며 용을 팔라 종용하시니 교활한 장씨의 내자가 비싼 값을 부르더라. 이에 모친께서 기지를 발휘하시어, 항시 품에 지니시던 화투패를 꺼내어 내기판을 벌이사, 파죽지세로 장씨의 내자를 압도하시니, 사내로 태어났다면 천하를 호령하였을 모친께서 이처럼 여인으로 태어나신 것이 다 선생을 세상에 내고자 하는 하늘의 높은 뜻이 아니겠는가. 모친께오서 용은 물론이거니와 흰 천 두벌까지 손에 들고 댁으로 개선하시니 비로소 선생의 존함이 득용, 존호가 백포(白布)이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각다귀같은 아이들의 철없는 장난질을 그르다 여기시어, 무리를 짓지 않으시고 항시 홀로 거닐며 사색을 즐기시니, 이를 못 마땅히 여기는 동무들의 핍박이 끊이지 않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악동들의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그들이 상처 받을까 싫은 내색 없이 꿋꿋이 버티시고, 오로지 그 고달픈 심사를 모친께만 조용히 고하시는 선생의 그 깊은 배려를 그 무지한 어린 것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러한 선생의 고고한 인품을 질시하여 선생을 고자질쟁이라 폄하하며 감히 존체에 몰매를 놓으니, 과연 하늘이 낸 사람의 유년기는 순탄치 않은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순리라 하겠다.
 
  학창 시절, 선생은 남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학문의 답습을 거부하시고, 오로지 스스로의 영성을 갈고 닦는데 주력하시니, 고리타분한 서책을 멀리하시고 나뭇가지를 붓 삼아, 땅을 종이 삼아 사색의 결과물을 기록하기를 즐기셨다. 주로 인체에 대하여 고민하셨고 특히 여인의 신체가 가지는 신비로움에 주목하시어 수 많은 글과 그림을 남기사, 그 학문적 성취에 수많은 동년배들이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이처럼 선생께서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음양의 오묘한 조화를 깨우치시매, 익히신 학문을 몸소 현실에 접목시켜 널리 행하시니, 비록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둔한 여인들로 인하여 잠시 옥살이를 하시는 등, 갖은 고초를 겪으셨지만 끝내 음양의 이치를 연구하고자 하는 뜻을 꺾지 않고 학문을 향한 고결한 지조를 만천하에 드러내시었다.
 
  고고한 학식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자만치 않고 항시 겸손하셨으나 불의에 항거하는 데는 결코 주저치 않으셨다. 선생의 나이 약관에 나라를 위하여 학생운동에 기꺼이 몸 담으시되, 그 공로를 남들께 알리기를 꺼려하시어 항시 대열의 가장 후미에 서길 즐기셨으며, 누가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스스로를 드러내기 보다는, 다른 친구들의 공을 널리 알리고자 하셨다. 이 어찌 성현의 풍모가 아니라 하겠는가.
 
  또한 선생께서는 인자하시어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으시니, 선생의 훌륭한 인품을 좇아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청을 하나하나 새겨들어주시매, 그들에게 때로는 직업을 주셨고, 때로는 비밀을 귀띔해 주셨으며, 때로는 계약을 성사시켜 주셨다. 이에 감읍하여 많은 이들이 선생께 진상품을 올리면, 선생께서는 우선 거듭 사양하신 후에, 지나친 사양은 예에 어긋난다 하시며 그들의 소소한 정성을 기꺼이 어루만져 주시었다.
 
  선생의 도움을 받은 치들 중 몇이 아둔하여, 선생께오서 억울하게 십년의 옥살이를 살게 되시니 그 때가 선생의 나이 불혹이셨다. 청천벽력과 같은 현실을 대함에도 선생께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히려 지금이야 말로 친히 가장 낮은 이들의 마음을 살필 때라 여기시어 대범하게 옥으로 발걸음 하셨으니, 그 뒷모습이 마치 야훼나 붓다와 같았다. 옥중에서 많은 것을 견문하시어, 세상의 부조리에 재차 분개하시고, 불쌍한 이들의 모습에 눈물을 지으시는데 시간이 흘러 어느덧 열 해가 훌쩍 지났으나 선생께서 스스로 아직 세상에 나갈 때 아니라 여기시어 그로부터 삼년을 더 옥중에서 우주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시니 그 경지가 하늘에 닿았음이라. 그러던 중 어느날, 지는 해를 보시다 아, 드디어 내 세상에 다시 나가 뜻을 펼칠 때가 왔구나 느끼셨으니, 복룡이 비로소 둥지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포효를 시작하였도다. 그리하여 선생께서 지상에 만연한 불의를 뿌리 뽑고 굳은 뜻을 세우시고자 그 발걸음의 시발점이 될 곳을 찾아 나서셨으니,  
      
 
  그런 전차로 김득용 선생을 귀 아파트 경비원으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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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가 발코니에 서서 밖의 세상을 내려다 본다. 넓게 닦여진 도로에는 한 대의 차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새벽을 밝히던 높은 빌딩들은 비석처럼 침묵한다. 밤의 도시에는 한 줄기의 빛조차 흐르지 않는다. 전 세계가 이처럼 정적의 품 속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아, 내가 마침내는 세상을 죽였구나, 최는 탄식했다.

 2029년 노르웨이 의회 노벨 위원회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사이에서 한 명의 과학자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유래 없는 진풍경이었다. 위원회는 전쟁이라는 단어를 이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삭제해버린 최의 공로에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기로 하였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왕립 아카데미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인간의 뇌와 디지털 신호를 직접적으로 연결한 업적이 최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을 안길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분야의 노벨상을 획득한 전례가 없었기에 노벨 위원회와 왕립 아카데미는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최가 수상소감을 발표할 것이 아니라 노벨상이 시상 소감을 발표해야 마땅할 것이라며 언론이 빈정거려도 위원회와 아카데미는 어떻게든 최에게 노벨상을 바치는 영광을 자기네 것으로 가져오고자 서로를 물어뜯었다. 정리는 의외로 쉽게 되었다. 컴퓨터 과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튜링상 위원회에서 완벽한 가상현실을 구현한 공로로 최에게 튜링상을 수여한 것이다. 뒷통수를 맞은 노벨 위원회와 왕립 아카데미는 부랴부랴 최초로 한 사람의 두 분야 중복 수상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최의 가상현실기계는 마법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감각을 제어하는 뇌의 각 부분들을 완벽히 분석해내어 섬세한 전기자극으로 감각을 날조하는 것이 동작원리였다. 작은 디스크에서 나와 뇌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가상세계에 인간들은 열광했다. 자기만의 새로운 세상 속에서, 가난에 치이던 한 샐러리맨은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었고. 공부가 싫어 부모님 몰래 학교를 나가지 않던 학생은 드래곤에게서 공주를 구해내기 위해 검을 들었으며, 평생 키스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노총각은 세계 각국의 미녀들과 매일밤 광란의 섹스파티를 벌였다. 최를 악마의 기계를 만들어낸 사탄의 부하로 매도하던 바티칸의 교황이 몸소 그 기계의 부질없음을 증명하려다 그렇게도 섬기던 주님을 영접하고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도 전한다.
 
 하지만 축제는 길지 않았다. 환희와 희열 속에 세상이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했다. 위조된 감각에 취한 인간들이 하나 둘 현실을 버렸다. 사람들은 일터에 나가지 않았다. 기업과 국가가 조금씩 바스라져갔다. "조물주가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면, 최는 약 칠십 억개의 세상을 만들어냈다."며 최를 극찬하던 언론조차 수많은 언론인들이 가상현실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공중분해되었다. 인간은 절대 끊을 수 없으리라 여겨졌고, 또 끊어서도 안되는 섹스를 끊었다. 실제 자신의 몸에 다가오는 죽음-대개는 아사餓死-을 감각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가상세계 속에서 안락사하는 인간이 늘어남에 따라 세계 인구는 급격한 감소추세에 들어섰지만, 인구통계를 새로 내기는 커녕 가족이 바로 옆에서 죽어가도 알아채는 사람이 없었다.

 죽음의 냄새조차 죽어버린 도시를 내려다보며 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저 어둠 속에서 또 몇의 생이 꺼져갈 것인가. 이대로 인류의 역사를 마무리 할 수는 없다고 최는 생각한다. 최는 거칠게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와 자신의 연구실로 향한다. 그 곳에는 하나의 스위치가 있다. 칠십 억개의 세상을 한 번에 죽이는 대신 단 하나의 세상을 살려낼 수 있는 그 강력한 스위치에 손가락을 올린 최의 머리에 고뇌가 스민다. 칠십 억개의 세상과 단 하나의 세상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인가. 이미 가상과 현실 사이의 구분이 무너진 이곳에서, 인류가 살아갈 세상을 나 혼자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째깍대는 시계소리가 최의 결심을 재촉한다. 마침내 최가 고개를 들고 스위치를 바라본다.

 최가 발코니에 서자, 어두운 도시에 하나 둘 불빛이 싹트기 시작한다. 도로에 차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몇몇의 인간들이 건물에서 나와 자신들의 행선지를 향해 걷고 있다. 그래, 이거면 됐어. 잘 한거야. 최는 웃으며 세상을 내려다 본다.

 

   

연구실은 어둡다. 스위치의 불빛이 깜빡거린다. 삐익- 사용자의 뇌파가 감지되지 않아 프로그램이 자동 종료 됩니다. 건조한 여인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울린다. 그러나 안락의자에 파묻혀 있는 최의 몸에는 아무런 미동이 없다. 최의 머리에 얹힌 가상현실기계의 불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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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케를 너에게 돌려주며.

 천장에 거꾸로 붙어있던 빈대를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잡았다. 엄밀히 말해 찍어눌렀다. 한 마리의 산 빈대가 사연 모를 거무튀튀한 자국이 되었고 하드커버 위의 필기체 'Rilke'는 'R찍혀서형체를알아볼수없게변한한마리빈대의사체ke'가 되어버렸다. 이제 내 방 어디에도 빈대와 Rilke는 없다.

 장미꽃 가시에 찔려 죽은 남자와 그 남자의 시집에 깔려 죽은 벌레의 알레고리를 생각해 본다. 
 
 사는 것이란, 예컨대 내가 우연히 기지개를 펴고 싶고, 동시에 별 이유도 없이 천장을 올려다 보고, 그 순간 천장에는 한 마리의 빈대가 우연히 매달려 있고, 동시에 별 이유도 없이 책상 위에는 네가 건네준 릴케의 기도시집이 다소곳이 올려져 있는, 기껏해야 그 따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잘 제련된 한 편의 시는 아닐 것이라고.

 네가 내게 건네 준 기도시집의 메타포를, 아니, 네가 내게 기도시집을 건네 준 메타포를 해독하기 위하여 며칠을 밤낮없이 매달렸었다. 잠 못 이룬 밤을 어느덧 손가락으로는 다 못 헤일 즈음, '네가 나에게 릴케를 주었어.' 이 한 행은 남몰래 너를 향한 사랑을 노래해 온 이전의 수많은 행들을 비로소 하나의 연으로 엮어내는 완벽한 장치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 메타포를 '너도 나를 사랑해.'로 해석하는 순간 스무 한 해 내 삶이 온전히 시가 되는 전율을 느꼈다. 그 한 편의 시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하여, 너에게 돌려줄 기도시집 속에 한땀 한땀 정성스레 내 마음을 새겨 넣었다. 릴케가 루 살로메에게 바치듯. 가난한 내 시에 너는 풍요로운 의미라고. 하나의 활유법이라고.

 네 기도시집 속에 릴케가 쓴 글보다 내가 쓴 글이 조금 더 많아졌을 즈음에야,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니는 너를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네가 내게 던진 기도시집은 메타포도 뭣도 아니라는 것을. 그저 잘못 쓰여진 시구, 퇴고의 순간에 지워져야 할 찌꺼기 시어에 불과하다는 것도. 네가 내게 릴케를 준 것은 내가 릴케로 빈대를 찍어죽인 것과 어쩌면 같은 의미는 아닐까?

 나의 시는 항상 지독한 퇴고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왜 잊고 있었던 걸까? 기도시집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다, 빗나간 시어를 제 자리에 꽂아넣어야 할 순간이 왔음을 문득 깨달았다. 네가 준 기도시집은 이제 너의 것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것도, 빈대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닌 고립된 시어가 되어버렸으므로, 네게는 새 책을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다. '두이노의 비가'를 네가 좋아할까 싶다.

 새 책을 사 오는 길에 꽃집에 들러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털어 장미를 샀다. 릴케를 절명시킨 그 장미가 무슨 종인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그에 뒤쳐지지 않을만큼 붉고 가시가 많은 장미다. 나와 너의 잘못 쓰여진 시를 갈무리하기 위하여, 이 장미를 나 혼자 가져야 할지, 너에게 전부 주어야 할지, 혹은 우리가 반반을 나누어 가져야 할지, 가장 붉고 아름다운 메타포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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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섹스 할 때 말이야. 무슨 생각이 드나?”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김이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은 그의 턱 근처에서 덜컥 제동이 걸렸다. 제아무리 음담패설에 도락이 있는 김이라고는 하나 아무런 복선도 준비운동도 없이 툭 튀어나오는 기습적인 질문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아차 싶었다. 젠장. 서론부터 깔아나갈 것을. 별다른 실적도 역량도 없고 그렇다고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닌 그를 그 거센 구조조정의 풍랑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그의 눈치가 그에게 일러줄 것이다. 서설도 없이 본론부터 덜컥 끄집어낼 만큼 나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고 또 간절하게 그의 도움을 동냥하고 있다고. 칼자루는 이미 그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눈앞에 있는 이 처연한 치를 한껏 얕잡아 봐도 무관하다고.

 “아니 이건 또 뭐야. 허허. 강 대리 요새 잠자리에서 첫사랑 생각이라도 나는가본데?”

 술잔을 들이켜고 카아- 소리를 내뱉음과 동시에 빈정거리듯이 한 마디 툭 던진 김의 얼굴위로 사내에서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본인은 모르는- 다소 비열해 보이는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왼쪽 입꼬리를 살짝 내리고 오른쪽을 심하게 올려 이빨은 물론 벌건 잇몸까지도 사정없이 드러내는 그 미소는 언제 봐도 도통 정이 붙지가 않았다. 며칠 전 점심시간 경리 이양에게 음탕한 농담을 던지며 치근덕대던 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 미소였다. 그리고 어제 내 책상으로 와 빌려간 시디를 돌려주며 나 방금 옥상에서 이양 저년 따먹었다. 라고 내게 귓속말하던 순간에도.

 “차라리 다른 여자 생각이라도 나면 하던 판은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텐데.”
 “그럼 뭐가 문젠데?”
 “그게 말이야. 한참을 잘 하고 있다가도 배 밑에 깔려 있는 아내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앉았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허. 그래서 하다가 말아버린단 말인가?”
 “대개는. 계속 하는 경우에도 끝까지 가 봤자 괜히 찝찝하기만 하더군. 끝나고 뒤따라오는 허무감은 말할 것도 없고.”

 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섹스와 관련해서는 이론과 실전 양면에 걸쳐 통달했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사는 이 친구의 성격으로 보아 내 문제를 들은 이상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면 스스로 패배감에 빠져 허우적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평소에 그리 큰 친분도 없는 김을 카운슬러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음, 뭔가 좀 색다른 걸 해보면 어떨까?”
 “색다른 거?”
 “제수씨한테 수영복을 입힌다거나, 뭐 교복을 입힌다거나. 그렇지, 교복 괜찮군.”

 뒤이어 김은 해결책이랍시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주절주절 내뱉기 시작했다. 돼먹지도 않은 방법들을 하나하나 일러 줄때마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 했다. 회사 옥상의 으슥한 곳에서 이양이 입고 있는 수영복이나 교복을 거칠게 찢어발기는 상상을 하고 있을까. 김의 얼굴에 그 미소가 은근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하튼, 평소와 다른 뭔가를 시도해 봐. 내 생각에는 권태 같군. 일상에 찌든 게지.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 해 봐. 자세도 바꿔 보고.”

 김에게 상담을 청했던 것은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상 외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입만 살았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비싼 술값을 지불하고 김이 꼴값하는 모습이나 지켜봐야 했을 뿐 믿음직스러운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다만 김이 코치한 대로 해 보고 꼭 결과를 알려줄 것을 다짐해야 했고 또한 첫 거래 기념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다음에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는 그가 무상으로 AS를 해 줄 것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약속받았을 뿐이다.



 

 아내와의 섹스는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는다. 오히려 상실의 도정일 뿐이다. 사랑, 열정, 쾌감, 흥분, 마지막으로 신음. 아내와 잠자리를 하면서 내가 잃어야 했던 것들을 차례차례 떠올려 본다. 남은 것은 이제 새털만큼 가벼워져 언제든 날아가 버릴 듯 불안하게 나부끼는 서로에 대한 부부로서의 의무감뿐이다. 나와 아내에게 있어 아직 서로가 부부라는 것을 증명할 길은 아무리 서로를 범해도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 우리나라 부부강간 입법의 미비점 안에만 자그마하게 남아있었다. 처량하게도 그랬다. 우리 아직도 부부지? 찌개를 끓이던 아내의 뒷모습에다 대고 질문했다.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밸브를 잠갔다.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던 찌개냄비는 이내 침묵했다. 아내는 두르고 있던 무늬 없는 회색 에이프런을 풀러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하자.
 혹시나 하고 준비했던 교복은 아내의 미간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단추 한번 열려보지 못하고 처연하게 바닥을 뒹굴어야했다. 침대는 유난히도 삐걱거렸다. 침대는 결혼식 전날까지도 구입해놓지 못한 유일한 가재였다. 나와 아내 모두 가구의 디자인이나 기능성에는 특별한 선호가 없었지만 침대의 경우만은 사정이 달랐다. 침대의 크기부터 높이나 스프링의 탄성, 심지어는 침대 머리 부분에 장식 되어 있는 부조의 무늬와 그 깊이까지, 우리는 어느 사소한 요인 하나에서도 의견일치를 볼 수 없었다. 결혼 후 첫 번째 부부싸움은 침대에 대한 선호도 차이라는 어찌 보면 허접하기가 짝이 없는 이유로 시작되어 이틀 만에 나의 패배로 끝났으며 아내는 자신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침대를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다.
 침대는 처음 나와 아내가 잠자리를 가지던 그 순간부터 내게 적대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그 소리를 참을 수 없었고 배 아래에 누워 있거나 혹은 배 위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때때로 불만을 토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자신은 한 번도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 말이 내 귀에는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와 뒤섞여 견딜 수 없이 불편한 앙상블을 이루며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침대의 비명은 세 번째 잠자리를 가질 때보다 네 번째에 잠자리에서 더 크게 들려왔고 역시 일곱 번째 아내를 안을 때보다 여덟 번째에 더욱 선명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에게 삐걱거리는 침대에 대해 투덜거리는 짓을 그만 둘 수 있었다. 나와 아내의 삐걱댐이 침대의 그것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위로 올라왔고 의무적인 반복 운동에서 해방된 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스스로가 놀랐다. 즐거움이어야 할 섹스가 내게 있어 힘겨운 싸움이 된 것이 언제부터일까. 회사 옥상에서 남몰래 나누는 김과 이양의 사랑은 어찌하여 열락이고, 내게 소유된 집에서 세상에 인정받은 나의 아내와 떳떳이 나누는 사랑은 어찌하여 체벌이어야 하는 것일까. 원인은 어디에 있나. 관계 중에 아내가 눈을 맞추기를 피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내의 성의 없는 신음이 내 정욕을 앗아가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무엇일까. 정체모를 남자의 손을 허리에 감은 아내가 그와 시시덕거리며 모텔로 들어가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일까?
 아내는 희열이 묻어있지 않은 거짓 교성을 내뱉으며 반복 운동을 계속한다. 나는 그 움직임에 따라 위 아래로 흔들리는 아내의 하얀 가슴은 볼 수 있지만 고개를 돌려버린 아내의 눈동자는 볼 수가 없다. 다른 곳을 응시하는 아내와의 섹스는 이미 껍질만 남은 내게서 오늘은 또 무엇을 앗아갈 것인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오로지 희락만을 남겨놓던 정상적인 섹스의 마지막은 언제였던가.
 문득 내 첫 번째 섹스가 떠올랐다. 상대는 지혜라는 비교적 흔한 이름을 가진 대학동기였다. 지혜는 내 첫 여자였지만 첫사랑도 두 번째 사랑도 아니었고, 나는 지혜의 첫사랑이었지만 첫 남자도 두 번째 남자도 아니었다. 지혜는 섹스가 끝나면 내 품에 안겨 비밀을 한 가지씩 듣고 싶다고 졸라대고, 그 대가로 그녀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해주는 귀여운 버릇을 가진 여자였다. 나와 지혜는 그녀의 하숙방 좁지만 삐걱거리지 않는 일인용 침대에서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는 뒤엉켜 지냈고 그런 관계는 나의 모든 비밀과 과거를 그녀가 알게 되어 결국 사정 후에 할 이야기가 바닥날 때까지 일 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 후 지혜는 자신이 태생적으로 비밀이 없는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결함품이라며 이별을 통고했지만 그녀와의 섹스는 내게서 아무것도 약탈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지혜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내와의 섹스가 내게서 첫사랑의 기억을 뽑아 올려 허무에 던져버리기 전까지는. 갑자기 아내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내 과거를 삼키고 현재를 삐걱거리게 하는 아내의 규칙적인 상하운동이 밉살스러워졌다. 그래서 할당된 만큼의 시간을 내 배 위에서 채운 후 아무런 말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샤워를 하러 안방을 나서는 아내의 뒷모습을 나는 치열하게 쏘아보았다. 침대는 아내가 내려오는 순간에도 여지없이 삐걱거렸다.



 

 회사 옥상에 몰래 사랑을 나눌 만한 으슥한 곳이 많다는 공공연한 비밀은 사실이었다. 혹시나 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김과 이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벤처회사들이 칸칸이 입주해있는 빌딩은 층마다 흡연실을 필수로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옥상은 침과 씹다버린 껌, 필터만 남은 담배꽁초로 범벅이 될 슬픈 운명에 처해진다.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우리 건물의 옥상처럼. 건물주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옥상에 벤치를 설치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휴식공간은 구색을 갖췄다고 보는 것일까. 다 낡아 하늘색 페인트가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바람에 펄럭거리는 70년대 공원에나 깔릴법한 벤치를 어디서 구해왔는지 참으로 용하다.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자 정면으로 몇 개의 높은 빌딩이 보인다. 안은 들어가 본적이 없어 모르긴 해도 아마 이 건물과 같은 벤처빌딩이리라. 안쪽이 비치지 않는 고급 유리로 외장을 통일한 커다란 신식 빌딩의 그림자가 누워있는 곳에, 독버섯처럼 여관과 모텔들이 자생하고 있었다. 아내의 필체로 쓰였을 것이 틀림없는 가공의 여자 이름이 마치 진실로 존재하는 이름이라도 되는 양 숙박부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을 그 모텔들이. 내가 아는 아내의 허리에 감겨있던 내가 모르는 남자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두 달 전쯤의 일로 기억한다. 나는 사내 식당에 앉아 혼자 늦은 점심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멀건 국속에 든 당근을 신경질적으로 골라내고 있던 내 핸드폰을 울리게 한 장본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멀건 목소리의 여인이었다. 당신 아내가 지금 어디 있는 줄 알아? 여보세요-에 대한 리액션 치고는 너무나도 일반적이지 못한 그 여인의 응답은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당근 조각을 식탁으로 추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구세요? 누군지는 알 것 없고, 지금, H빌딩 뒤 M모텔. 네? 여보세요? 딸깍. 점심시간은 이십분이 남아 있었다. H빌딩까지 제 시간에 갔다 오기는 빠듯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뒤이어 생판 모르는 여인의 전화제보를 눈곱만치도 장난으로 여기지 않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아내는 아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 단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부에서 진행되든 외부로 배설하든, 사람은 태생적으로 일탈 없이는 삶을 유지할 수 없게 생겨먹은 동물이므로.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당기시오’라고 쓰여 있던 문을 힘차게 밀며 안으로 들어가던 모르는 남자의 옆에서 아내는 나에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격에 맞지 않게 고상한 연극을 입장권도 없이 몰래 훔쳐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들을 향해 욕지거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이상하게 죄스러웠다. 삶이라는 것은 그들이 남녀 주인공인 드라마였고 나는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는 징그러운 조연으로 태어났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하게도 그 때 이미 드라마는 내 손을 떠나 있었다.
 멀건 목소리의 여인은 그 후로도 제보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그 여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H빌딩의 뒷골목으로 힘차게 달려가야 했다. 지금. H빌딩 뒤 아무개 모텔. 매번 이 두 마디가 그 여인이 하는 이야기의 전부일 따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억양이 퍽 낯익었다. 내게는 더 없이 매력적인 두 마디였다. 지금. 어디. 내가 그 장소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면 항상 모텔에 막 들어서려 하는 모르는 그 남자와 아내의 뒷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걸로 미루어 보면 무섭게도 그 여인은 모르는 남자와 아내의 동선은 물론 내 위치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셈이었다. 처음에는 불길하게 느껴졌던 그 정체모를 여인이 궁금증의 대상으로 바뀐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지금. H빌딩 뒤 S모텔. 전화를 받고 그 장소로 달려가는 내 머릿속에 모르는 그 남자와 아내보다 멀건 목소리의 여인이 더 크게 자리하기 시작했던 것은 또 언제부터였을까. 보자기에 선글라스를 쓴 채 어느 전봇대 뒤에 숨어 모르는 남자와 아내 그리고 나를 모두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여인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모르는 그 남자의 부인인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그 남자의 또 다른 여자일까. 나는 항상 그 여인의 정체가, 그리고 그 목적이 궁금했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내 부부생활을 지탱하는 마지막 부목이 되었다. 아내가 나를 떠나 그 모르는 남자와 공식적인 부부가 되어 더 이상 H빌딩 뒤 아무개 모텔을 찾지 않는다면, 멀건 목소리의 여인은 더 이상 내게 볼일이 없을 테니까. 아직은 이혼할 때가 아니다. 내색할 때도 아니다. 아직 그 여인의 실루엣조차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여어, 강 대리. 지금 옥상에 혼자 있는 거야? 여긴 혼자 올라오면 안 되는 거 몰라? 불문율이라구.”

 언제 올라왔는지 넥타이 없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옥상 문에 기대 서 있는 김의 얼굴에는 예의 아니꼬운 미소가 가득했다. 요새 자주 보는듯한 저 미소.

 “그러는 자네 옆구리에도 이양은 보이지가 않는군. 벌써 버림받은 건 아닌가?”
 “하하하, 이 친구. 그러지 않아도 지금 올라오고 있는 중일거야. 3분 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래서 말이야. 강 대리 구슬픈 심사야 너무도 잘 알지만 자리 좀 비켜줬음 하는데.”
 “이런. 우리 사이에 그 정도 구경은 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섭섭한 걸?”
 “허, 이 친구 오늘따라 농이 좀 세군. 고민하던 일이 깔끔하게 잘 해결 났나본데? 어떻던가, 본인의 어드바이스가 약발이 좀 받던가?”
 “전혀. 교복만 불쌍하게 되었지.”
 “뭐? 그렇단 말이지.......”

 예상대로 김은 자신이 내놓은 방책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듣자 급히 침울해지는 듯했다. 진지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김의 얼굴에서 동료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주겠다는 의욕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표정은 사냥감의 뒷발에 채여 자존심에 상처 입은 야수의 그것에 가까웠다. 딱하게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뿌리에 자리 잡은 해충은 발견하지도 못한 채 마른 가지만 치고 있는 꼴이었다. 불쌍한 김은 2분 뒤에도 여전히 생채기가 그대로인 자존심을 움켜쥔 채 이양의 몸에서 처량하게 위안을 찾겠지. 이양은 오늘따라 신경질적인 김을 이상한 눈으로 올려다볼지도 모르지. 불쌍한 김. 불쌍한 이양. 안방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어찌됐든 말이야. 좀 강하게 해보라구. 그게 다 자네 섹스가 약하기 때문이라니까. 제수씨를 정신도 못 차리도록 만들어 주란 말야. 아주 죽여 버리라구.”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는 내 등 뒤로 김은 거의 포효했다. 언젠가 디스커버리 채널을 보다 그런 포효를 들은 적이 있다. 혈투 끝에 패배해 자신의 영역에서 밀려난 사자가 핏자국에 남루해진 갈기를 바람에 흩날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갈 곳이 없다고. 오, 불쌍한 김.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진정 아무것도 모른다. 죽여 버리라고?



 아내가 죽었다. 뺑소니였고 목격자는 없었다. 아내는 도와 달라고 소리 한번 쳐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빈소는 집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B 대학병원에 마련되었다. 나도 죽은 아내도 인간관계를 자랑할 만큼 벅차게 살아온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나마 직장 동료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빈소는 마치 빈소가 아닌 듯 한산했다. 나는 의무적으로 그들에게 절을 했고 그들은 의무적으로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고 나는 또 의무적으로 눈물을 보여야 했고 그들은 또 의무적으로 내 어깨를 세 번씩 두드려주어야 했다. 모르는 그 남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내의 영정사진은 새하얗게 웃고 있었다.
 저녁이 되고 조문객들의 식탁에 편육과 술들이 차곡차곡 놓여졌다. 빈소는 조금씩 시끌시끌해지고 이내 곳곳에서 화투 패가 착착 감기며 짝을 맞추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다. 쌌다!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과장님 끗발이 잘 안 서시는데요? 에이, 씨발. 첫 끗발이 개 끗발이네. 빈소는 야유회가 되어 들썩거렸다. 자신의 죽음이 여흥거리가 된 것에 화도 나지 않는지 아내의 영정사진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이 벼락 맞을 개새끼야!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뭐, 이 걸레 같은 년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 좀 보게.”

 아무리 죽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폈다고 해도, 상처한 남편이 듣기가 민망할 정도의 욕설이 빈소에서 나오는 것인 될 일이 아니었다. 화가 나 고개를 돌려보니 욕설과 함께 알루미늄 접시니 젓가락이니 소주병 따위를 던져가며 신나게 싸우는 것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치들이었다. 이양의 화장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곰팡이처럼 노랗고 검게 뭉쳐져 있었고 김의 볼에는 접시 위에 있다 접시째로 이양에 의해 날아간 편육이 붙어 있었다. 상황은 명료했다. 김에게 이양은 노리개였고 이양에게 김은 사랑이었으리라.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이런 때 이런 장소에서 터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영정사진이 내가 교복을 건네주었던 그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 아내를 위로했다. 저 치들이 회사 옥상에서 하던 짓을 여기서 재방송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훨씬 낫잖아. 그렇지? 아내의 영정사진이 다시 새하얗게 웃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조문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자 살금살금 장내로 스며들던 침묵은 기다렸다는 듯 빈소를 휘감았다. 그나마 아직 남아 술잔을 치고 있는 조문객들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불현듯 외로움이 엄습했다. 죽기 전에 이미 먼지가 되어버린 애정이었지만 그래도 간 사람은 역시 나의 아내였고 확실히 우리의 생활은 씨실과 날실처럼 꼼꼼하게도 얽혀 있었다. 다만 그 무늬가 아름답지 못했을 뿐. 올이 반 이상 풀려나간 스웨터를 입고 맞바람에 선 듯 섬뜩한 삶의 추위가 느껴졌다. 옷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지만 담뱃갑은 텅 비어있었다. 젠장, 흥분한 김에게 건네 준 것이 마지막 한 개비였던가.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는 아내의 먼 친척에게 빈소를 부탁하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디스 주시죠. 아, 라이터두요. 손바닥으로 담뱃갑 아랫부분을 탁탁, 두 번 친다. 비닐을 벗기고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더욱 더 슬퍼해야 했던 그 의무감이 담배 끝에서 붉게 타들어 가는 듯 했다. 밤이지만 하늘은 묘하게도 맑았다. 내가 죽는 날에도 이런 식이리라 생각하니 죽기가 참 아쉬워졌다. 멀리 우리 집이, 아니 이제는 나의 집이 보였다. 급하게 나오느라 불 끄는 것을 잊었던지, 베란다 뒤로 보이는 거실은 커튼 사이로 얇은 줄무늬의 빛을 발하고 있다. 발인은 내일 아침으로 예정되어 있으므로 저 등을 끄지 않으면 내일 오후까지 거실에는 필요 없는 등불이 켜져 있게 될 터였다. 아내는 그런 것을 매우 싫어했다.
 집에 들어와 형광등을 끄고 차가운 거실 바닥에 몸을 뉘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공간에 나는 이빨이 딱 들어맞는 나사못처럼 뿌리를 내렸다. 죽으려면, 이렇게. 헛소리가 절로 나온 덕에 오늘 들어 처음으로 살짝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밤마다 치근덕대던 내 모든 고민을 시원하게 싸안고 떠난 아내에게 말도 못할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내와의 무미건조한 섹스도. 또 그것에 의해 잃어야 할 것들도. 쉼 없이 삐걱거리던 침대는 내일 아내가 묻히고 나면 안방에서 축출될 것이다. 그것이 나는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삐걱거리는 침대가 없어진다. 침대가 없어진다. 내일부터는 한동안 바닥에서 자야지- 하고 이젠 사형수 꼴이 난 침대를 조롱해본다. 돌이켜보면 내 취향에 맞든 아니든 침대는 애초부터 내게 필요가 없었다. 침대란 놈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더라도 사용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삐걱거리게 되어 있다. 운명적이고 제도적이다. 다시는 침대에서 섹스를 하지 않으리라. 바닥에서만 여자를 안으리라. 절대 삐걱거리지 않는 바닥에서만.
 침대가 아닌 곳에서 뒤엉켜지는 나와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느닷없이 커다란 흥분이 온 몸을 적셨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찾아 온 것인지, 주체할 수 없는 정욕에 이미 몸은 달아오를 데로 달아오르고 호흡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연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침대가 없는 섹스가 아닌가. 몸이 절로 이렇게 될 밖에.
 누군가가 필요하다. 절대로 어쭙잖게 혼자서 처리할 수준의 것이 아니다. 급히 머릿속을 뒤져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여자들의 이름과 동시에 그녀들을 안을 수 있는 가망성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도 아직 채 다 식지도 않은 아내의 시체를 지키고 있다가 침대를 들어낸다는 생각 따위에 발정한 남자를 안아 줄 여인이 있기나 할까?
 있다. 그녀가 있다.
 핸드폰을 열고 수년이라는 세월동안 한 번도 눌러 보지 못했지만 결코 잊을 수도 없었던 숫자의 배열을 입력한다. 아직 번호를 바꾸지 않았기를 바라며 초초하게 통화연결음에 집중했다. 가사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그리고 물 흐르듯 연속적으로 내뱉어지는 랩 음악이었다. 지혜는 이런 음악을 듣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들려오는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준비해 두었던 인사말들을 머릿속에서 깡그리 삭제시켰다.

 “문지혜씨 번호가 맞습니까?”
 “응. 문지혜씨 번호가 맞아. 오랜만이네 자기.”
 “내 목소리 아직 안 잊었나보군.”
 “말하는 방식까지도 고스란히. 어찌됐던 첫사랑이잖아. 대외적으로.”
 “잘 살고 있나? 결혼은 했는지 모르겠군.”
 “매우 잘. 아직 미혼. 자긴 어때?”
 “이쪽도 매우 잘. 낮에 아내가 죽었지. 그것만 빼고는. 대외적으로.”
 “문장이 불편해지네. 그래, 자기가 내게 몇 년 만에 전화를 준 이유는? 그것도 상처한 날.”
 “섹스. 하고 싶다. 아니, 해야겠어.”
 “많이 대담해진 건 축하할 일이네. 하지만 자기도 알지? 난 비밀 없는 남자랑은 자지 않는다는 거.”
 “비밀. 있지. 아직 세상 누구도 모르는 비밀. 지혜가 처음으로 듣게 될 거야.”
 “당기는군. 좋아.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님 자기가 이쪽으로 올래?”
 “침대.”
 “뭐?”
 “지혜 집에는 침대가 있나?”
 “자기가 옛날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그건 힘들겠는데? 내 집 생기고 나서부터는 침대 없이 살고 있어. 미안하게도.”
 “그럼 내가 가지. 어디?”
 “화곡동.”
 “근처에서 연락하지.”

 현관을 박차고 나와 문조차 잠그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내달린다. 6층은 섹스를 하러 당장 화곡동으로 달려 가야하는 몸 달은 홀아비에게는 불편할 정도로 높게 느껴졌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내 열쇠가 꼭 맞아 들어갈 회색 아반떼XD쪽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오늘 세차를 마치고 나서는 다음 출근까지 탈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핸들을 쥐고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을 넣었다. 화곡동. 지금 시간이면 이십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으리라.





 변호사가 되었다는 지혜는 예전과는 달리 제법 인텔리 분위기를 풍겼지만 안경을 썼다고 해서 그녀의 섹스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바로 시작한 키스는 서로의 변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섹스로 이어졌다. 지혜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무의식중에 세 번을 ‘이거다’라고 외쳤으며 ‘오늘 완전히 죽여주겠다’고 다섯 번 귀여운 으름장을 놓았으며 ‘삐걱거리지 않아’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열세 번이나 했다고 한다. 이제껏 해 왔던 모든 섹스를 합친 것만큼이나 격렬했던 시간은 결국 끝이 났고 나를 뒤에서 안은 지혜는 예의 그 귀여운 버릇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그래서 자기. 오늘은 어떤 비밀 이야기를 해 줄 건데?”
 “이번 건 지혜가 잠자리를 같이 한 남자들에게 들었던 어떤 비밀보다 더 충격적일거라고 보는데.”
 “그렇게 자신 있어? 믿기지 않는데?”
 “자신 있고말고.”
 “좋아. 그럼 이렇게 해. 나도 자기한테 이야기 해 줄 엄청난 비밀을 준비해 놨지. 들으면 보통 충격이 아닐걸? 내가 먼저 이야기 해 줄게. 그리고 자기 비밀을 듣지. 그래서 만약 내 비밀이 더 큼직한 놈이면 자기는 마누라 죽은 당일 날 옛 여자 집에 찾아와서 강제로 범한 몹쓸 놈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거지. 어때? 딜?”
 “어지간히 대어인가 보군. 만약 내가 이기면?”
 “그땐 평생 아무 비밀도 묻지 않고 자기랑 자 주지.”
 “진심이겠지?”
 “물론. 난 변호사라구.”
 “콜. 시작해봐.”
 “좋아. 잘 들어봐. 지금. H빌딩 뒤 S모텔.”
 “뭐?”
 “아니, 목소리에 주목해서 잘 들어보라구. 지금. B 대학병원 장례식장. 관속.”
 “너.......”
 
 지혜가 품고 있던 비밀은 폭탄이었다. 저 멀건 목소리. 멀건 목소리의 여인의 정체에 대해 얼마나 많이 생각해왔던가. 아내의 불륜을 제보하는 멀건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내 자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적은 있을지언정, 십분 전까지 내 품에 안겨 겨운 숨을 헐떡거리던 내 첫 여자라고 추측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놀라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 H빌딩 뒤 S모텔. 지금. 지금. 언제나 아내와 모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했던 그 무기질의 지금.
 자, 이제 자기 차례야. 놀라는 나의 모습에 지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 금방이라도 나를 파렴치한 강간범으로 만들 수 있지만 봐 주고 있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분명 위험했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그녀는 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마치 김이 그랬던 것처럼.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자, 졌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면 신고는 참아주지.”
 “아내가 죽었어.”
 “뭐야, 방금까지 나랑 뒹굴던 사람이 아내 이야기를 꺼내? 이제 와서 동정표라도 사겠다는 거야? 자기답지 않은데?”
 “뺑소니 사고였어. 목격자는 없었지.”
 “아까 이야기 해 줬잖아.”
 “아내를 친 차는 아반떼XD. 차 넘버는 7612.”
 “뭐?”
 “아내는 정말 놀랐을 거야. 자기를 치고 달아나는 차의 넘버가, 생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네 자리 숫자가 자기도 잘 아는 숫자였으니.”
 “무, 무슨 소리하.......”
 “그리고 그 7612 아반떼XD는 지금. 화곡동에 있지. 어느 잘나가는 여자 변호사의 집 앞에.”
 “.......”
 “목격자는 없었어. 단 한사람도.”

 지혜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게임은 나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을.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백지처럼 하얗게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떠는 지혜의 표정을 보니 다시금 온몸에 흥분이 돈다. 이제 매일을 찾아 올 거야. 너는 더 이상 내게서 아무런 비밀도 듣지 못하고 그 몸을 바쳐야 하겠지. 그리고 그때마다 지금 같은 표정을 지어야 될 거야. 내가 더욱 더 흥분할 수 있도록. 그렇지. 그렇게 말이야. 걱정 하지 마. 매일 죽여 줄 테니.

 잘 들어 봐. 어디선가,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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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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