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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Chronicler 2008/08/27 00:53


1. 風속성 2

방랑자의 반댓말이 정착민이라고 손쉽게 대답하는 사람은 가슴에 바람風을 품을 자격이 없다. 그런 이들의 머릿속에는 고정된 안락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방랑의 대척점에 서 있는 단어는 바로 순례다. 우리 바람을 사랑하는 이들은, 매일 신발끈을 고쳐 묶으며,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절대로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적지의 유무만이 차이가 될 수 있다. 방랑과 순례를 적절하게 교차반복시키는 바람이 되리라. 때로는 풍요롭게, 때로는 주밀하게.




2. 서울역에서 중랑천까지

그 전화를 끊었을 때, 그러니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고집의 끝을 살짝 스쳐지나갔을 때, 아니 더 엄밀히 말하면, 네 분노의 원인을 찾아서 모든 껍질을 하나씩 벗겨나가 결국 남은 고갱이라는 것이 내게는 단지 너의 아망일 뿐이라고 느껴졌던 그 직후에, 나는 바로 나의 잘못을 깨달았다. 남자들은 모두가 안다. 모든 충돌상황에서 여자는 해답이 아니라 공감을 원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다면 그런 말이 유명해졌을리조차 없겠지. 어쨌든 나는, 이러다가는 나중에라도 정말 한번은 큰일 나겠다 싶어 충고를 아니, 충고의 가면을 썩 어설프게 뒤집어 쓴 질책을 내뱉었고, 너는 마치 세상이란 혼자 나서 혼자 가야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슬픈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갈 마음을 먹었다. 꽤나 빠른 결단이었다. 내 얼굴을 마주보고 너는 울었지만, 나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당장의 네 마음을 풀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내일의, 혹은 모레의 네 마음이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악역을 하였다. 나는 네 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나는 말했다. 거짓말, 이라고 대답하는 너의 눈에서 말과는 달리 나를 믿어주는 빛을 느꼈기 때문에 안심했다. 그리하여 너와 함께 걸어온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그 언젠가 노래방에서 I'm my fan 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2절까지 이어부르던 너의, 가장 큰 팬이 되어주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아까 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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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9]

Chronicler 2008/08/20 00:41


1. 인스턴트를 먹는 시간

지치지 않는 사랑을 찾아 해매던 때가 홀연히 지나고 어느덧 교차점에 섰다. 믿고 싶은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님을 인정하는 길로 들어서면 어떨까. 깨어지지 않는 진공관 속에 갇힌 두 사람이 멀리서 달려와 서로의 외벽에 충돌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입 모양만 보고 서로의 진심을 가늠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판단착오 아니면 거짓부렁이라고, 그렇게 써 있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어떨까. 그곳에는 아마 바쁜 어른의 사랑이 놓여있을 것이다. 전자레인지를 여세요. 사랑을 집어넣으세요. 자동조리 버튼을 누르세요. 3분만 기다리세요. 사랑을 꺼내세요. 마음껏 사랑을 하세요.

당장은 미워보인다지만 사람이 길을 만들고 길이 사람을 만든다 하더라.




2. 가해적 본능

또 한번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을 닫고 스스로의 내부로 침전하였다.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 껍데기 속으로 도피하였다. 날카롭게 핏발이 선 감정들이 부딪는다. 넌 참 불쌍한 여자야, 라는 말을 무기로 그녀를 불쌍하게 만들어보았다. 맞아, 난 참 불쌍한 여자야, 라고 눈빛으로 대답하는데, 맙소사 어떻게 된 세상인지 내 주위에는 온통 불쌍한 여자만 득시글거린다는 생각에 뜨악했다. 누군들 스스로 불쌍하고 싶었을까. 어떤 사건이 그녀들을 불쌍하게 만들었는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그 연쇄사건들의 범인이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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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cler 2008/08/18 21:51


1. 아빠가 물렸다

밭에서 잡초를 뽑던 아버지가 독사에 물리셨다. 극독은 아니었기 때문에 급히 대강의 응급처치를 하고 당신의 발로 병원을 찾아갈 수 있었단다. 진료도 받고 해독제도 맞았지만 한 이틀 입원해서 경과를 두고 봐야 한다는데, 그런 말씀을 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눅진눅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다. 문병 올 사람 하나 없는 인생이다. 부인과는 애당초에 웬수 소리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고, 돈 문제 때문에 형제간도 이미 남보다 못하다. 자식 가슴에 아픈 상처 박아놓은 것, 스스로도 잘 아는 처지라 아들 딸 하나씩 두고도 아쉬운 소리가 영 쉽지 않다. "니는 아픈 데 업제?" 물어오는데 "나는 괜찮아요. 여기는 뭐 뱀도 없고." 라고 대답했더니 허허허 웃음 소리 사이로 묵은 내 나는 세월이 새어나온다. "조리 잘 하세요." 하고 전화를 닫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아버지는 나보다 저 하늘에 더 가까이 닿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버지는 시간이라는 독사에 물렸던 것이 아닐까.




2. 룸메이트는 수강신청을 앞두고 지랄중이다

그럴싸한 한 편의 소설을 써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여름방학이었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어느덧 다 저물었다. 영어 욕심도 있었고 개강 전에 몇 과목을 미리 공부해 놓겠다는 어쭙잖은 다짐도 가졌었는데 결국 얻은 것이라고는 체중뿐이다. 가장 넘기기 힘들다는 3학년 2학기의 개강을 생각하면 마음이 실로 척연하다. 폭염이 내리꽂히는 날, 절절 끓는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건너가야하는 방랑자의 기분이다. 답은 있다. 발 끝으로 달리면 한다. 앞선 발의 발가락이 땅에 닿기 전에 뒤선 발이 허공을 박차야 한다. 그래도 아마 몇 개쯤의 발톱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워 멈칫하지 말자. 순간의 정지는 모든 것을 익사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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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cler 2008/08/17 22:09


1. 부자대화

과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5호선 둔촌동 역에서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가장 안쪽 소변기에서 야구모자와 반바지를 입은 아저씨가 소변을 보고 있었는데 대여섯살 쯤으로 보이는 그의 아들내미가 제 아버지의 왼쪽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오줌을 누고 있었는데, 꼬맹이가 입을 열었다. "아빠, 이거 뭐 파는 거야?" 꼬맹이가 가리키는 것은 콘돔 자판기였다. 이거 흥미진진해지는데? 하고 있는데 아버지 왈 "콘돔 파는 거야." 이곳이 아버지의 가장 큰 범실이었다. 꼬맹이의 두 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콘돔이 뭐야?" 아버지가 흠칫 하는 것이 옆에서 소변보는 내게도 느껴졌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아버지, 역시 쉬이 반격하지 못한다. 그때 꼬맹이, 쐬기를 박는데 "아빠, 콘돔이 뭐냐니까? 딸기향은 또 뭐고~" 예상도 못한 공격에 휘청거리는 아버지 겨우 한다는 대답이 "빨리 일로와서 손 씻어. 어서." 오줌은 자기가 눠 놓고 왜 애꿎은 애가 손을 씻나. 꼬맹이 손 씻으며 공격을 이어나가는데 "아빠, 콘돔이 뭐냐니까~" 아버지의 얼굴은 한없이 붉어지고 "그런거 있어."로 겨우 리시브를 하며, 화장실을 돌아 빠져나가는데, 꼬맹이 마지막 스매싱을 날린다. "아빠! 나도 콘돔 사줘~!"



2. 담금질

나는 우리가 아직 더 강해질 여력이 남았다고 본다. 지새는 밤은 대장장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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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숲 [20080817]

Poet 2008/08/1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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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숲에서
부연설명과 미사여구를 몰아냅시다
이곳은
끄덕임과
가로저음만으로도
충분히 정교하니까,
이제 우물은 사람에게 내어주고
우리는 개울로 떠나자구요
폐를 닫고
아가미로,
목소리를 버리고
뻐끔대는 입모양으로
방울지는 숨결만으로

아, 칭찬은 여기까지
대화합시다

차가운 악수나
뜨거운 키스는
너무 진하니까요
가볍게 내버리고서
오늘부터는
마주보는 눈빛을 더욱
묽도록 안아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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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 지음 / 임두빈 옮김



불특정 다수의 면전에 대놓고 설교-그것도 지독히 현학적인 동시에 감각적인-하기를 즐기면서도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이 여기 있고, 우리는 그를 '브라질의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잘 팔려나가는 작가들 중에서 파울로 코엘료는 녹록치 않기로 따지면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 이유는 평생을 두고 보아도『어린 왕자』의 내용이 볼때마다 새롭다는 유명한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파울로 코엘료가 꽤나 노련한 "멘토"이기 때문에, 그의 책이 제시하는 이정표는 아무리 퍼내도 메마르지  샘물처럼 달콤하고 풍부하다. 책 시장에서는 언젠가부터 '스토리'에 공세에 밀려 '교훈'이 숨을 죽이고 엎어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기에 파울로 코엘료의 선전이 더욱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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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를 통해 전세계 수 많은 이들의 영혼을 울려대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순탄치 않았던 그의 성장기가 얼마나 많은 보물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는지는 그가 쓴 작품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그것들은 하나같이 소설과 에세이, 처세서의 경계점에 교묘하게 걸터앉아 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문장을 아름답고 쓸모있게 세공하는 기술 뿐이었다. 원석은 이미 그가 글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그의 인생 속에 촘촘히 박혀있었다.


이 글을 쓰던 당시 육십을 맞은 그가 자신의 내부에 숨어있는 여성성과 자비로움을 책으로 잉태한 것은 사실, 그간의 역사가 그녀들에게 자행해왔던 수많은 속박과 그릇된 편견들을 하나둘씩 거꾸러뜨리고 있는 여성들의 출현에 비하여 시기적으로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직도 남아 있는 여성성에 대한 편견과 뿌리깊은 부조리를 걷어내는 문학적인 무기로서의 제 몫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여성단체에서 회원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장하고 있지만, 이 책에 "패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 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이다.(실제로 파울로 코엘료도 이 책 전체-후기도 포함하여-에서 패미니즘이라던가 여성의 권익이라는 말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은 아직도 마녀를 혐오하는-혹은 두려워하는- 대다수의 남성이-혹은 소수의 여성이- 읽어야 할 듯하다. 이제 우리 모두가 마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들의 권능을 인정할 순간이 온 것이다.

"나에게 마녀란 직관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여성,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여성,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이다."


그 외의 이야기(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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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5]

Chronicler 2008/08/15 23:52


1. 風속성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나를 내주지 않을 생각이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면 가차없는 정답을 내놓을 생각이다. 영원이라는 것을 믿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내 마음도 꽤나 닳았다. 모든 관계가 세월에 얻어맞아 바스라지는 운명이라면, 나는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침입에 조금 더 강경하게 대처할 생각이다. 어제 잔인해 본 사람은 내일 더 쉽게 잔인할 수 있다. 어제 버려본 사람은 내일 더 편하게 버릴 수 있다. 나는 변할 생각이다. 내 변화를 막는 이들과는 싸울 생각이다. 미워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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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cler 2008/08/13 20:45


1. 다녀왔습니다, 다녀오세요

당초 '주식회사 Show me the money'의 주 임무는 암암리에 대구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피가 튀고 뼈와 살이 발리는 전문적 훈련을 끝마친 세명의 대원 'B', 'H', 'J' 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고담 대구는 조금씩 평화와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대구 시민 누구도 그 평화가 그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세 명의 대원 또한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대원 B가 모두에게 말했다.
"이 곳의 치안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것 같군. 이제 여기는 자네들 둘에게 맡길까 하네."
그러자 대원 J가 물었다.
"그럼 자네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
대원 B는 엄지와 검지를 펴서 턱에 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대답했다.
"MB가 시장으로 있는 서울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 하네. 아직은 큰 사단은 나지 않고 있는 듯 하지만 어떻게 될 지는 모를 일이지. 서울이 제 2의 고담대구가 될 수도 있네. 아니 MB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 나라 전체가 고담화 될 수도 있다네."
그러자 대원 H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자네의 말에 일리가 있네. 이곳 대구는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서울로 올라가 그 곳의 평화를 수호하게나!"
"그래, 비록 우리가 몸은 떨어져 있지만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뜨거운 마음이야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하하하하하!"
그들은 손을 맡잡으며 뜨거운 눈물로 대원 B를 배웅하였다.

그리고 2년, 이미 안정세로 돌입했던 대구의 치안은 눈에 띄게 나아졌으며, 서울 또한 예상외로 큰 동란이 없는 안정된 시기를 보냈다. 그 즈음 대원 J가 모두를 호출하였다.
"바다 건너 아주 먼 나라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네. 내가 직접 캐나다로 가서 그 곳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니, 아무쪼록 대한민국을 잘 부탁하네."
대원 B와 대원 H는 대원 J의 너무도 글로벌한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몸소 인천공항까지 대원 J의 변신복과 각종 최신무기를 공수하며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빛은 이제 '주식회사 Show me the money'가 세계 전체의 평화를 책임질 때가 왔다는 책임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MB가 대통령이 되고, 광우병 사태가 발발하자, 대구와 서울에 흩어져있던 H와 B는 서둘러 출동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채 장전도 끝내기 전에, 이미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오는 것이 아닌가? 비록 최신식 무기와 변신복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가녀린 촛불 하나에 의지에 평화적으로 평화를 쟁취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대원 H가 B에게 말했다.
"그들 스스로가 평화를 지켜내는 저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이제 이 나라에서 우리 Show me the money가 할 일은 없는 것 같군."
그러자 B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네. 괴수가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우리는 아직 이 땅에서 할일이 남았어."
그 말을 들은 H가 대답했다.
"음, 자네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나는 저들에게 한 번 희망을 걸어보고자 하네."
의아한 B가 되물었다.
"그럼, Show me the money를 해체하자는 이야기인가?"
H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이 나라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나는 평화를 원하는 더 무력한 이들을 도우러 떠날까 하네."
잠시의 침묵 후 B가 물었다.
"그럼, 자네도......"
H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는 우선 필리핀으로 가 볼 생각이네. 그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평화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다네."
B가 대답했다.
"그래. 이제는 우리가 세계를 짊어질 때지. 좋아. 극동은 내게 맡기고 자네는 동남아시아의 평화를 책임지게나. J가 나가 있는 북미의 정세가 날로 좋아지고 있다고 하니, 아마 그는 내년쯤에는 돌아올 걸세. 그때 우리 연구소에 모여 회포를 푸세나."
H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손을 마주 잡고 멀리 지는 석양을 내다보았다. 지고 있는 붉은 태양이 그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대구 갔다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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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겠어요

당신은 머얼리서 오세요
과거 위에 또 한 겹의 과거로 겹쳐 누운
수 많은 어제를 헤엄쳐 와요
시간이 단단하게 영근 나무
달콤한 그늘에서 기다리겠어요
생각만 하여도 결리는 그 이름을
가지마다 널어 놓겠어요
잎맥에 그 얼굴 깊이 새겨
젖이 흐르겠어요
꽃 대신 씨앗이 되겠어요

심어주세요
나의 발목을
나팔꽃처럼 칭칭 감고 올라가는 그 이름을

가을에는

뿌리가 되어 주어요
내 안에서 걸어나와 부드러운
나이테가 되어 주어요
씨앗으로 기꺼이 기다리겠어요
가을에는
나무 그늘이 되어 기다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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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0]

Chronicler 2008/08/10 20:35


1. 인사

안녕, 내 돌아갈 곳. 척척한 낮에도 바삭거리는 밤에도 언제나 거기 있는, 내 울 자리, 웃을 자리, 너무 오래 비워 둔 자리, 그럼에도 반짝, 원없이 반짝거리는 자리. 안녕, 안녕, 내 것을 나누어받기 위해 살아있는 작은 미소, 틈틈이 훌쩍거리는 눈꼬리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온정이 있는, 안녕, 안녕 나의 작고 신비한 얼굴, 가슴, 둥그런 마음이 방긋 웃으며 함께 데구르르 구르자 두 팔을 벌리는, 내 부푼 설렘에서 사박사박 걸어 나온, 안녕, 안녕 나의, 나의, 소중한 나의, 내, 안녕.




2. 책장 넘기기

세상에 홀로 온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 한줄의 근거로 증명되어지는 명제는 모조리 거짓이다. 압력 없는 진실, 공리, 자명한 이치를 모조리 의심하라. 누군가의 피나, 땀이나, 적어도 손때라도 묻어 있는 것들만 납득하라. 믿지 말라. 믿고 싶다면 손자국을 내라. 지문을 남겨라. 다쳐도 좋다. 진리에 베인 상처는 아물면 세상을 들어올리는 근육이 된다. 경계하라. 회의하라. 당연히 여기지 말라. 저울에 올라앉은 것들에 온정을 베풀지 말라. 그리고 눈을 감지 말라.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동안 모든 것은 허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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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9]

Chronicler 2008/08/09 23:10


1. 국지성 호우

집을 나서려는데 갑작스레 쏟아진 큰 비에 당황하였다. 해저 도시의 천장에 구멍이라도 난 마냥 쏟아지는 빗물에 큰 우산을 받쳐들었음에도 다리가 흥건히 젖었다. 간신히 버스를 타고 가는데, 마장 쯤 오니까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시립대 근처에 오니까 아예 땅바닥조차 젖어있지 않았다. 그 놈의 비는 왕십리 주변에만 내리고 있었던가 보다. 우산은 짐이 되었다.

그런 거 있다. 쏟아지는 곳에만 쏟아지고 주변은 흔적조차 없는 그런 거. 그런 사람도 있다. 24시간 1주일이 내내 밝은데, 어느 한 부분만 건드리면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 그런 기억도 있다. 아무리 행복한 순간에 있더라도 떠올리기만 하면 쓴웃음이 나는 슬픈 기억.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영역만 벗어나면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는 필요 없는 우산처럼 우울도 슬픈 기억도 모두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라는 것, 잊으면 나만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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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8]

Chronicler 2008/08/08 20:00


1. 달라지지 않는 이야기

그저 몸부림일 뿐인데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깨닫고 나면, 남자는 소심해지는 동시에 대범해진다. 이러면 안되지만 이럴 수 밖에 없다는 고리타분한 역설을 들고 나와 상대방을 울리기도 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아니, 정말 사랑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답이 너무나 확실한 문제에서도 우선 제 상처 챙길 생각을 먼저 한다. 아프지? 그러니까 가란 말야. 따위의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동시에 괴롭더라도 상대가 더 버텨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에 날카로운 칼집을 내어 아픈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 거기 피흘리는 사랑이 있구나, 있었구나. 하고 재확인하는 잔인하고도 미련스런 방법을 쓰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족족 궁색한 변명이 되고 말을 할수록 초라해지는 스스로를 느끼면서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믿기 때문에 상대의 아픔을 모른 척, 눈물을 보지 못한 척 묵묵히 자기의 할 말을 마친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다소 거친 비난을 통해 자신이 아직 뼛속까지 그리 나쁜놈은 아니라고 어필하는 객쩍은 이기심도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서야 할 시간이 되면, 상대방의 마음에서 새어 나오는 슬픈 고름을 닦아 주지도 않고서는 그 따가운 상처위에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를 거칠게 둘러 버린다.
그것이 상대방을 더욱 숨조이게 하는 일임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어쨌든 마지막에는 아름답게 포장해야 하니까, 하고 무책임한 합리화에 안도하며 옷깃을 세운 뒷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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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7]

Chronicler 2008/08/07 21:55


1. 가을은 먼 곳에

입추는 해가 더할수록 지랄스러워진다.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만들고 있다. 덥다고 ㅆㅂㅆㅂ 하며 에어컨 온도를 1도 낮추는 순간, 그 다음해 여름의 평균 온도가 1도씩 올라간다. ㅆㅂ이 ㅆㅂ을 낳고 그 ㅆㅂ이 또 ㅆㅂ을 낳는 셈이다. 그 긴긴 세월 물을 다스리고 땅을 일구는 데 아무런 문제없이 이용되어 오던 절기가 오늘날 이렇게 어이없는 개념으로 거듭난 것은 전부 우리 탓이다.




2. 폭풍간지의 원천

간지남의 인생은 모름지기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어야 한단다. 그런가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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