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대학 근처 치킨 가게에서 배달 알바를 하겠다고 하면, 나는 쫓아다니면서라도 당신을 뜯어말리기 위해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겠다. 한 달을 오토바이에 콜라와 튀긴 닭을 싣고 신나게 달리다 보면 이전에는 더없이 향긋하던 닭 냄새에 슬슬 구역질이 오르기 시작하고 거기서 한 달을 더 버티면 결국 내가 치킨을 배달하는 건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나를 배달하는 건지 도통 모르게 되는 것이 이 일이다. 치킨 냄새에 반응하는 후각세포를 깔끔하게 포기할 의지가 있다면 당신은 정체성을 사수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도 있다. 게임 끝, 치킨 월드는 평화를 되찾았다-라고 생각하는 경솔한 당신의 앞에 대망의 라스트 보스, '대학생 냄새'가 등장한다. 자, 배달의 용사여 닭다리를 움켜쥐고 돌격!

  내 보기에 그들과 나 사이에서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이는 단 하나, 부모님의 지갑에서 연간 천만 원씩 줄기차게 사 년을 뽑아내어 누군가에게 헌납한 대가로 하사받은 '학생증'이라는 이름의 교통카드를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68가지의 양념이 버무려진 닭기름 냄새가 잔뜩 밴 고물 오토바이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학생증과 나의 오토바이 열쇠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순간, 학생증의 주인은 묘하게 우위에 서고 오토바이의 임자는 별 이유도 없이 죄스럽다. 시킨 지가 언젠데 이제 와요! 그들은 나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을 항시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 그럼 나는 그들의 환영에 몸둘 바를 몰라 고개를 숙이며 니네 학교가 지랄같이 꼬불꼬불해서요, 라고 생각하면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리하면 그들은 과연 그 거룩한 학생증의 소유자답게 관대한 모습을 보이며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맞죠? 라고 하문하시고 나는 매번, 아니오, 저는 이종철인데요, 라고 대답해 올리고픈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그녀를 만난 것은 10월 초순이었다. 어떤 10월 초순이었나 하면, 나타날 시간이 한 달이나 지났음에도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는 이 죽일 놈의 가을을 직무유기로 고발할 방도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런 10월 초순이었다. 그런 10월 초순 중에서도 어떤 순간이었냐 하면, 여름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올해 여름이란 자식은 아마도 하와이라든가 남아공 같은데서 밀입국한 놈이 아닐까, 까지 생각하고서는 애꿎은 하늘을 향해, 출입국 관리소 씨발, 엿이나 쳐 드삼! 하고 외치며 손가락질을 해대던 순간이었다. 눈앞에 정말 천국에서 지금 막 내려왔다고 해도 삼 초 안에 믿을 수 있을 것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나타났다. 한 손에는 A4 사이즈의 설문지를 들고. 출입국 관리소 만세.
 
  안녕하세요, 여학생회에서 여성의 권리에 관해서 남성분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 중인데요. 잠시만 시간 좀 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질문은 모두 열 개고요. 읽어보시고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아니다, 매우 아니다 중에서 한 군데 동그라미를 치시면 되세요. 라고 말하는 또랑또랑한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분명 그때 내 눈에는 설문지가 이런 식으로 보였다.
 
  당신은 내게 첫눈에 반했습니까? - 매우 그렇다.
  당신은 나를 만나기 위해 23년을 연애 한번 안 하고 기다렸습니까? - 매우 그렇다.
  당신은 내 전화번호를 원합니까? - 매우 그렇다.
  당신은 지금 나와 키스를 하고 싶습니까? - 매우 그렇다.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 매우 그렇다.
                                         .
                                         .
                                         .
                                         .
  당신은 내가 죽으라 하면 당장 죽을 수도 있습니까? -  매우 그렇다, 에 동그라미 두 개.
 
  매우 ‘매우 그런’ 설문지를 그녀에게 돌려주자, 방긋 웃던 그녀의 표정이 이내 매우 의아하다로 변했다.
 
  정말로 여성 운동이 매우 역차별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네. 그러시면서 정말로 여권 신장에 매우 찬성하시는 거예요? 네, 네. 제대로 작성하신 거 맞으세요? 네....... 이것 보세요. 진지하게 부탁드렸는데 이렇게 장난을 치시면-까지 그녀의 질책이 전개되는 순간, 내 눈에는 설문지가 이렇게 저렇게 보였단 말예요, 라고 당당하게 해명할 수도 없는 나는 하염없이 부끄럽고 민망하여 쥐구멍은 물론 콧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나머지 후에 내 평생 가장 모자란 행동으로 기록되는 짓을 하고 만다. 저기, 수고 많으신데 이거 드시고 하세요, 라는 도통 가당치도 않은 멘트를 날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그녀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노천강당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학생들에게 배달되어야 할 치킨을 어쩌자고 그녀에게 선사했던 걸까. 외간 남자에게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선물로 받아 본 경험 같은 것은 전무한지, 그녀는 할 말을 잊은 표정으로 한참을 닭이 든 봉지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은 내 머릿속에 앞으로 있을 주인아줌마의 불호령과 알바비 삭감에 대한 걱정이 입력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이거 혼자 다 못 먹어요. 저 쪽에 가서 같이 드시고 가세요.
 
  요는, 이 짓도 이제 더는 못해먹겠군, 이라고 생각하는 짓도 이제 더는 못해먹겠다 싶을 즈음 그녀가 짜잔 하고 나타나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린 것이다. 뭐야, 이 짓도 할 만하잖아,

  라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한 달쯤이었을까. 가끔씩 걸려오는 ‘H대학 본관 앞 두 번째 벤치로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이라는 주문전화는 그녀와 나의 암호였다. 주인아줌마의 입에서 그 암호가 전달되면, 보통 거기까지는 도보로 배달하는 게 정상인데도 나는 재빨리 오토바이에 올라 가능한 최고 속력으로 달린다. 빨리 오셨네요. 네, 네. 이거 먹고 가시면 늦어서 주인아줌마한테 혼나는 거 아니에요? 아뇨, 괜찮아요. 네, 그럼 뜨거울 때 우리 어서 먹어요. 네, 네.

   H대학을 다니는 학생 중 나를 ‘미세스 치킨 배달쟁이’ 라든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아니라 ‘종철씨’로 불러주는 유일한 여자와 마주 앉아 뜨거운 닭을 나누어 먹는 일은 사실 그리 뜻 깊은 시간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왜 사람들은 ‘후라이드 반 양념 반’ 보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할까, 에 대한 토론 같은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저 튀긴 닭을 배달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인 한 남자가 너무도 상냥하고 아름다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꼭 의미 없는 시간도 아니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후라이드 반 양념 반’ 과 다르지 않은 것이 당연하듯, 그렇게 나는 ‘당연히’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토이 크레인의 3요소는 도전, 아쉬움, 희망이다. 그 즈음 그녀를 제외하고 내가 심취하기 시작한 유일한 것은 바로 이 토이 크레인이었다. 애초에는 오락실 같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인형 뽑기’ 라는 식으로 즐겨 불리던 이 토이 크레인은, 황소개구리마냥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하여 이제는 슈퍼 앞에도, 술집 앞에도, 가끔씩은 정육점 앞에도 놓여있다. 물론 우리 가게 앞에도 놓여있다. 이 토이 크레인을 관리하는 것도 알바생이 할 일인데, 딱히 관리할 것도 없는 것이 아무도, 정말 아무도 이 토이 크레인에 동전을 넣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단한 초등학생들의 코 묻은 동전을 수집해야 할 목적으로 태어난 이 기계덩어리는 그저 주문전화를 기다리는 알바생의 심심풀이 상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물론 열쇠를 꽂아 그 안에 있는 인형을 그냥 끄집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 힘으로 크레인을 조작해 저 주황색 털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눈이 큰 봉제 인형을 집어야만 떳떳하게 그녀에게 선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은 선물로 주기에는 좀 민망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배달이 없는 시간을 나는 모조리 토이 크레인에 우겨넣었다. 오백 원을 넣는다. 띠리리링. 철커덕. 동전이 크레인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 움직임이 스틱에, 스틱을 조작하는 내 왼손에 연결된다. 오른쪽, 전진, 전진, 오른쪽 전진, 약간 왼쪽, 그렇지, 그렇지. 크레인의 위치는 절묘하게 맞아들었으나 풍 맞은 할머니  손아귀 마냥 힘이 없어 그녀를 닮아 눈이 큰 봉제 인형을 집기가 무섭게 떨어뜨려버린다. 봉제 인형이 주황색 머리칼을 나풀대며 제 자리에서만 오르락내리락 반복하기를 몇 회, 이번에도 결국 크레인은 내 컨트롤에서 벗어나 좌측 하단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힘없이 축 늘어진다. 급료의 30%에 해당하는 양의 오백 원들이 다시 주인아줌마의 지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지만 조금도 아쉽지가 않았다. 토이 크레인의 3요소는 언제나 도전, 아쉬움, 희망이기 때문에.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대며 뒤늦게 찾아온 올해 가을은 부끄러웠는지 한 달 반 남짓 머무르다가 서둘러 H대학의 교정을 떠나버렸다. 가을이 떠나고 난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말고사라는 놈이었다. 대학생들은 부랴부랴 분주한 척을 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가게 매상은 점심이나 저녁보다는 열두 시가 지난 심야에 훨씬 짭짤했다. 그녀에게서의 암호가 끊긴지 두 달, 시험 준비에 바쁜 모양이지. 나는 더욱 토이 크레인에, 엄밀히 말해 그녀를 닮은 봉제 인형을 건져 올리는 데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날 밤은 무척 추웠다. 두꺼운 패딩 파카를 아무리 단단히 여며도 어디론가 찬바람이 스며드는, 이상하게 추운 새벽 두 시였다. 오토바이에 ‘양념 반 후라이드 반’과 콜라 한 병을 싣고 동아리방이 모여 있는 건물을 향해 달리는데, 몹시 그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 학교 안 어딘가에서 공부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자고 있으려나. 바람 안 스미는 따뜻한 곳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랬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하며 영어듣기 동아리의 문을 똑똑 두드리자, 과연 바람이 안 스미는 따뜻한 영어듣기 동아리방의 문을 열어준 것은 놀랍게도 그녀였다.
 
  어,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나를 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적잖은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때, 그녀의 어깨 뒤에서 어, 자기 저 사람 알아? 하는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동아리방의 안쪽에 멀대 같이 키가 큰 사내 녀석이 반팔 티셔츠를 걸치고 탁자 밑에 사정없이 널브러진 종이 쪼가리와 책들을 주워 올리고 있었다. 오빠가 닭 시킨 거야? 과연, 여기는 지나치게 따뜻하군,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사내에게 물었다. 어, 내가 시켰어. 얼른 가지고 와서 앉아, 라고 그가 대답했다. 척 봐도 ‘대학생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자식이었다. 새벽 두 시의 동아리 방에서 그와 그녀는 단둘이 공부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고 있었을까.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맞죠? 그녀가 물었다. 아니오, 저는 이종철인데요, 라고 대답했다. 만 이천 원짜리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받고 이만 원을 내밀면서, 여기요, 잔돈은 필요 없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과연, 여기는 지나치게 따뜻했고 나는 몹시도 추워졌다. 얼른 돌아 나왔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상하게 추운 새벽 두 시였다.

  미친 듯이 가게로 달려 내려와 오토바이를 팽개치듯이 던져 넣고는 그와 그녀에게 잔돈으로 줘야 했을 팔천 원을 모조리 오백 원짜리로 교환했다. 주인아줌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관심을 거두고 튀기던 닭을 내려다봤다. 나는 씩씩거리며 토이 크레인에 다가가 열여섯 개의 오백 원을 한 번에 투입구에 밀어 넣고는 거칠게 스틱을 움켜쥐었다. 씨발, 좆같은, 좆같은, 까지를 내뱉고 나자 과연 좆같은 것이 그녀인지 그인지 나인지 아니면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인지 모를 지경에 이른다. 과연, 이것이 치킨 배달부의 운명인가, 튀겨진 닭들의 저주인가. 나는 스틱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거세게 좌우로 흔들어 그녀와 꼭 닮은 큰 눈의 봉제인형을 조준하고 부서져라 버튼을 강타한다. 실패, 실패, 또 실패. 이런 씨발, 나와! 좀 나와, 이 개 같은 년아! 그 때,

  집었다! 좋아, 좋아, 조금 더, 밖으로 끌고 나와, 그렇지, 그렇지!

  띠리리링. 결국 실패. 크레인은 그 개 같은 년의 인형을 거의 다 옮겨놓는가 했더니 막판에 놓쳐버리고는 좌측 하단의 제 자리에 돌아와 병신처럼 늘어졌다. 토이 크레인의 3요소는 실패, 절망, 그리고 비어버린 주머니였다. 아, 이놈의 좆같은 세상아! 토이 크레인의 상단부 플라스틱을 두 주먹으로 내리쳤지만 의외로 튼튼해 주먹이 아팠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토이 크레인을 적셨다. 68가지의 양념에 버무려진 양념 치킨이 67가지의 양념에 버무려진 양념 치킨과 얼싸안는 장면을 멀리서 훔쳐보는 후라이드 치킨이 된 기분이었다. 

  종철아, 주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토이 크레인 위에 널브러져 울어대다가 주인아줌마의 호령에 눈물을 닦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를 닮은 인형이 원래 놓여있던 자리에서 주황색 닭 인형을 발견했다. 벼슬은 없고, 얼굴의 반을 갈색 부리가 차지하고 있는, 몸 전체가 주황색인 닭 인형이었다. 파란색과 검정색이 들어간 플라스틱 눈동자가 왠지 슬퍼 보이는 그 녀석이 애처롭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를 닮은 봉제 인형 밑에 깔려 숨죽이고 있었던가 보다. 종철아, 종철아! 네, 가요 사장님. 닭 인형의 눈을 외면하고 얼른 가게로 들어서려는 순간 분명 그 닭이 부리를 열고 내게 말했다.

  집어 줘.
  뭐?
  집어 줘. 꺼내 줘.
  뭐?
  집어 줘. 꺼내 줘. 살려 줘.
  너, 누구야, 닭 인형이야? 닭 인형이 나한테 말하는 거야?
  아니오, 저는 이종철인데요.
 
  아니오, 저는 이종철인데요. 그 녀석은 분명이 그렇게 말했다. 집어 달라고, 꺼내 달라고, 살려 달라고. 종철아! 배달 안가니! 주인아줌마가 가게 밖으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닭 인형의 부리와 주인아줌마를 번갈아보았다. 아줌마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호통을 치려는 순간, 내가 말했다. 아니, 닭 인형이 말했다. 아니, 내가 말했다.


 
  사장님, 가불 좀 해주세요. 전부 오백 원짜리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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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꿈을 꾸었다.

 "여봐, 어디 있는지 알겠어?"

 근처의 수색을 마치고 돌아오는 S의 표정은 난처함 일색이다. 내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한 번 고개를 젓고는 다시 낡은 지도를 뒤적거린다. S는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하면 되지, 라며 내 어깨를 토닥이고는 뒤쪽 나무 등걸에 걸터앉는다. 나는 의외로 고무되어 지도를 접었다 폈다 돌렸다 뒤집었다 하면서 필사적으로 '그것'의 위치를 파악하려 한다. S는 그런 내 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윗도리를 벗는다.

 "오빠, 찾아냈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녹색과 푸른색의 긴 풀섶을 젖히며 A는 나타났다. 아직, 이라고 S는 짧게 대답하고 A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A는 빙긋 웃더니 그녀와 S 사이에 서 있는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S에게 달려가 안긴다. 나는 무안한 듯 두 배 빠르게 지도를 접었다 폈다 돌렸다 뒤집었고 동시에 시선을 S와 A가 앉아있는 쪽으로 둔다.

 S의 근육은 과연 부럽다, 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A의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이 역동적이다. 그 굳센 양팔이 그의 레종 데트르, 라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본다. 하지만, S가 가진 수많은 것 중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아무래도 A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왠지 내가 전혀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그녀를 S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녀를 가지고 싶어한다. 이유는? 이유는? 곰곰이 생각해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자, 나는 그냥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혼자 만족해 고개를 끄덕인다.  

 세 번쯤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정확히 지도 중앙에서 '그것'의 위치를 발견한다. 젠장, 여태 왜 이걸 못 찾은 거지? 이유는? 이유는? 곰곰이 생각해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자, 나는 그냥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혼자 만족해 고개를 끄덕인다.

 세 번쯤 고개를 끄덕이자, S와 A가 다가와 찾았어? 라고 물어본다.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지도 한 복판을 짚는다. 그곳에는 지도에 쓰여있는 다른 어느 글자보다도 더 크고 밝은 색으로  떡하니 '그것'의 이름이 쓰여있다. S와 A는 만족한 표정으로 수고했어, 네가 해낼 줄 알고 있었어, 라는 식으로 나를 치하한다. 나는 썩 기분이 좋다.
 
 '그것'은 호수의 한가운데에 잠겨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S는 여기서부터는 자신의 몫이라며 나머지 옷들도 훌훌 벗어 던지고 준비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레종 데트르 목록 하단에 '페니스'를 추가한다. 이윽고 가벼운 체조와 스트레칭을 마친 그가 호수로 뛰어든다. 오빠 화이팅, A가 앙증맞은 목소리로 응원을 보낸다.

 S가 없으면 내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는 A와 단둘이 앉아 S를 기다리는 조용한 시간은 점차 길어지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A를 바라보았지만 A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호수 한가운데만을 응시하고 있다. 이윽고 호수 가운데서 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마치 호수 밑바닥에서 장외 홈런성 타구라도 맞은 것처럼 S가 허공으로 퉁겨져 나와 우리가 있는 곳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한다.

 나와 A는 놀라서 그에게 달려간다. 나는 얼른 그가 쓰러진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의 상체를 일으켜 무릎 위에 올리고는 그를 흔든다. 이내 그가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연다.

 "친구, '그것'을 찾았어. 하지만, 난 이제 틀린 것 같아.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는 그를 더욱 흔든다. 그러자 그는 내가 부러워하는 그 근육질의 왼팔을 들어 올려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이미 늦었어, 나는 죽어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한다. 아, 그는 이미 늦었구나, 죽어야 하는구나,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또 A를 보며,

 "A, 자리를 좀 비켜 줄래? 마지막으로 이 친구에게 할 말이 있어."

 라고 부탁한다. A는 언제 어느 구석에서 살인귀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어두운 톤의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덜덜 떨면서 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잠깐 그녀의 가여운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는 아차 싶어 급히 내 팔에 안긴 그를 내려다본다. 그는 생에 마지막 남길 말을 위해 눈을 감고 진지하게 어휘를 고르고 있다.

 그의 팔 근육은 아직도 갓 물 밖으로 건져진 생선처럼 파들거린다. 혈색이 나쁘기는 하지만 체온은 정상인 것도 같다. 다시 보니 아무리 봐도 죽을 필요까지야 없는 것 같아서 죽는 거야? 하고 내가 확인차 물어보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렇구나. 나는 불현듯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지막 부탁이 있어. 꼭 들어주겠지? 넌 내 가장 친한 친구니까."

 문득 나는 내 팔에 안겨 있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느낀다. 마지막이라는 말 따위는 하지 마, 라고 내가 울먹이며 말한다. 봇물 터지듯 흐르는 눈물이 내 시야 속 그의 이미지를 흐린다. 울지 마라, 라고 오히려 죽어가는 그가 나를 위로해 준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눈물을 닦고는 작게 코를 삼킨다.

 그는 목숨과 바꿔 손에 넣은 '그것'을 내 손에 쥐여준다. '그것'은 뜻밖에도 둥근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둥글다는 것이 뜻밖이라고 느낀 것이야말로 뜻밖이다, 라고 생각할 즈음, 그가 힘겹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내 마지막 부탁은, A에 관한 거야."

 유언치고는 비교적 또박또박하게 그는 말한다. 왠지 나는 그것이 더욱 슬프다고 생각한다. 말해 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겠어. 나는 한껏 결의에 찬 모습이다.

 "A를, 네가 지켜줬으면 하는데."

 나는 꼭 그렇게 하리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A가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내가 A의 마지막 사랑이 될 수 있게 지켜줘."

 나는 꼭 그렇게 하리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죽어버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기 직전의 그는 생전의 어느 순간보다도 더 힘차고 생기있는 모습으로 내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

 내 대답을 듣기 전에는 아무리 죽여봐도 그는 결코 죽을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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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 무라카미 류 / 한성례 역



인도에 있나요, 류.
30년이 지났네요. 당신의 플룻은 아직 소리가 나는가요.
그 미친듯이 비오던 날 우리가 헤매이던 밭은, 학교는, 활주로는 그대로인가요. 그 흉측한 전조등은 아직도 죄없는 어둠을 발가벗기고 있나요. 당신에게 목졸려 죽고 싶었던 그날, 살갗을 찔러대던 그 역한 도시의 심장은 아직도 세상에 회색 피를 돌리고 있나요. 당신이 보았던 그 검은 새는.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요. 그 시절 갈 곳을 몰라 하염없이 해메이던 우리는 사실 어디로 가고 싶었던걸까요? 헬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약들과 악취 나는 섹스파티를 통해 우리가 좇던 윤곽이 희미한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새, 우리를 훔치던 그 검은 새의 악마같은 혀를 우리는 진정 끊어내고 싶었던 걸까요?
지금에 와서, 그때 검은 새를 보았다던 류의 말은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해요. 우리는 그 시점에 이미 검은 새의 부리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길고 좁은 그 목구멍을 통해 한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지도. 류, 어떻게 생각해요? 지금 류는 어디에 있나요. 혹시 이미 검은 새의 뱃속에서 소화가 되어 버렸나요? 아니면, 결국 모든 영양소를 착취당해 어느 차가운 길바닥에서 구역질 나는 배설물로 굳어 있지는 않나요? 설마, 그 비좁고 어지러운 길을 거슬러 나와 끝내 그 검은 새를 죽여버리고 어느 어둡고 조용한 바에서 한잔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요. 류의 플룻, 그 음률 속에서 나는 인도를 보았어요. 인도가 아닌 다른 인도.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그 푸른색의.
 


P.S. 류, 당신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오늘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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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에, 라고 이제는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그녀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몇 방울 되지 않는 눈물을 닦겠다고 그녀는 루이뷔통 핸드백에서 구찌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꾹 눌러댔다. 어젯밤, 그녀를 만날 생각에 요동쳤던 가슴은 막상 그녀를 눈앞에 두자 이상하리만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혹시 내가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테이블 아래로 양손을 내려 왼손 검지와 중지로 오른쪽 손목을 짚어보았다. 이 근처였는데, 이 근처였는데, 하면서 몇 번을 고쳐 짚었지만 맥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단다, 라고 그녀는 또 한 번 울먹였다. 진실이다. 그녀가 십칠 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나를 찾아다녔는지, 그 얼마나가 얼마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 그러셨구나. 나는 짧게 대답하고 아이스티 컵 표면을 흐르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뭉갰다.
 아버지는? 하고 묻자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슬픈 표정을 연출하며 고개를 두 번 저었다. 사실 네 아버지가 누군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단다. 그땐 너무 어렸었거든, 이라고 꾹 다문 그녀의 입술이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 그러셨구나. 나의 대답에 그녀는 더욱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너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많이 힘들었지? 라는 그녀의 말에 드디어 심장이 울컥대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름도 한 번 궁금해 물어보지 않는 당신의 '너'는 여느 버려진 자식들이 그렇듯 보육원과 남의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고, 찬밥을 훔쳐 먹거나 음식점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지금은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리며 살고 있고 섹스 중에 목 조르기를 좋아하는 어떤 유부남 덕에 죽기 직전까지 간 적도 많다고, 이 자리가 파하면 바로 그 남자를 만나 그 죽을 것 같은 섹스를 할 작정이라고, 섹스가 끝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 변태 같은 남자에게 아이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이라고,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솟음치는 말들을 끝내 눌러 막으며 나는 단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두 번 저었다. 그녀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보통 이런 말을 할 때는 손이라도 꼭 잡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을 마주 보자 다시 가슴 속에 냉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메두사다. 한 가닥 한 가닥이 살아있는 뱀처럼 생기를 띈 그녀의 머리칼, 그것도 명품이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너무도 힘들었단다, 그녀는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이스티를 그녀에게 끼얹어 볼까 고민하다 이내 포기했다. 저는 다 용서했으니까 너무 미안해 마세요, 아줌마. 그리고 얌전히 일어서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카페의 문을 밀며 살짝 돌아보니 그녀는 테이블에 그대로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그때는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에, 라고 이제는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그가 운을 떼었다. 그때는 회사에서도 짤리고, 뭐 굳이 짤리지 않았더래도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잖아. 알지? 그의 손에 목이 졸려 있는 나는 입 대신 코로 응, 하고 대답했고 그는 더욱 흥분해 허리를 흔들어댔다.
 마누라는 돈 내놓으라고 보채지, 자식새끼들은 학원 못 보내준다고 아빠 취급도 안 해주지, 어디 살맛이 났었겠냐구. 안 그래? 아응. 여편네가 지 서방 알기를 우습게 아는 거야. 돈을 벌어 와야 자주겠다는데, 지가 무슨 비싼 마담이라고. 그치? 응, 컥, 으응. 그렇게 힘들 때 널 만난거지.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는 밥은 굶어도 여자는 굶고 못사는 놈이거든. 근데 이건 뭐 돈 있을 때는 그렇게 아양 떨던 것들이 쪽박 차고 나니까 본 체도 안하더라. 씨발, 드럽고 치사한 년들. 자기는 진짜 천사라니까. 구세주야 구세주. 혹시 알아? 자기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디 시골 같은데서 난장 까고 삽질하다 강간으로 잡혀 들어갔을지. 그지? 으응, 켁, 켁,
 그래서 말인데, 이제 자기 놔 줄려구. 켁, 이런 천사를 나 혼자만 독점해서야 되겠어? 이제 새 일도 조금씩 자리 잡아가는 것도 같고, 킥, 켁, 다시 집에 돈 꼬박꼬박 들여 바치는 착한 서방에 바람직한 아빠 한 번 되 보지 뭐. 켁켁, 그래 그래, 자기 놔 준다 이거야. 좋지? 컥, 컥. 그동안 나잇살 먹은 아저씨한테 주느라고 수고 많았어. 이게 우리 마지막 섹스니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죽여주지. 어때, 좋지? 켁, 케엑. 뭐? 더 졸라달라고? 킥, 킥. 크엑.    


 그래서 나는 일단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내 작은 옥탑방 천장에 목을 매달기로 한 것이다. 안다. 지금 이 힘든 순간을 넘기면 분명히 내게도 좋은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언젠가 이제는 전혀 힘들지 않은 순간이 와도, 그때는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에, 라는 말만은 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2007년 9월 10일이다.




한페이지단편소설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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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


윤(倫)과 불륜(不倫)의 멍에와는 상관없이, 사랑은 그저 사랑인가 보다. 외양간의 황소가 멍에를 쓰고 들에 나와도 여전히 황소이듯이.

요즘의 독서가들의 내공이 얕지 않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소심한 나는 위의 한 줄을 적어 놓고 두 가지가 두렵다. 내가 불륜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두렵고, 에쿠니 가오리가 도쿄 타워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두렵다. 그래서 이야기하자면,

엄밀히 말해 네 명의 주인공들은 불륜중이지만, 다른 이야기들 속의 불륜자들 처럼 세상에 생채기를 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누구도 탓하지 않는(물론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에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이며, 흉터가 남는 것은 그들의 가슴 뿐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애절할 수 있다. 오히려 구속이나 동거 따위를 다 걷어냈기 때문에 서로의 몸과 마음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사랑. 소설 속에는 불륜으로 인해 벌어지기 십상인 드잡이나 애증의 트라이앵글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갈망이나 질투 따위의 보편적인 요소를 다 지닌 또 다른 형태의 일반적 사랑인 듯하다. 때문에 기다림이나 함께함에 대한 구절들에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에쿠니 가오리를 싫어했던 나는, 이제 그녀의 글이 가지는 힘을 이렇게 해석하려 한다. 자칫 무겁게 다뤄지기 쉬운 이야기들이 감정이라는 섬세한 표면위로 흐르기 위하여 체중을 줄인다- 가벼운 것은 에쿠니 가오리의 매력이다. 깊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향한 통로를 넓게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글은 부드럽게 읽혀나간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숨겨진 메타포나 알레고리를 발견하고 또 이해해야 하는 독서에 지친 독자들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에서 조금 더 직접적이고 감정적에 기반한 카타르시스를 만날 수 있다. 사막은 사색을, 오아시스는 휴식을 선사한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에 입각한 편견일 수도 있다.      

왜 책의 제목은 도쿄 타워일까. 이유를 그럴 듯하게 써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나의 읽기도, 나의 쓰기도 아직 새파랗게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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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 자크 아탈리


살면서 한번쯤 이런 질문을 허공에 던지곤 한다. "우리는, 혹은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향해 가는가?" 많은 성현들이 그 해답을 위해 고심하였고 각자의 철학을 정리해 세상을 견인해왔다. 하지만 그 중에 무엇 하나도 한 줄 짜리 인생을 위한 지배적인 정답은 되지 못한다. 결국 누구도 우리의 출발지와 도착지를 정확히 알 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 어려운 문제 속에 누구나 알 수 있는 하나의 진리가 들어있다. 인간은 어딘가에서 '와서' 어디론가 '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말, 수레, 알파벳, 종교, 민주주의......인류의 모든 육체와 지성의 산물은 유목민들 즉, 노마드의 손끝에서 뻗어나와 그들의 경로를 통해 곳곳으로 퍼져왔다. 그들은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토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들에게 정착이란 죽음과 동의어였다. 그 움직임 속에 녹아 있는 무궁무진한 자유가 창의를 낳는다. 어디론가 떠날 필요는 누구에게나 항상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생존은 흐름 속에 안착한다. 19세기보다 20세기에서 더욱 그랬듯이, 20세기보다는 21세기에 우리는 더 분주히, 더 멀리, 더 많이 떠나야 한다. 고인 물은 썩는다. 물 뿐이 아니라 인간이나 사회와 같은 모든 물리적, 개념적 유기체는 정지하는 순간 죽음을 향한 초읽기에 들어간다. 정착의 순간적인 안락함에 안도하지 말자, 방심하지 말자. 죽음은 내부에서 새어나올 수도, 외부에서 스며들 수도 있는 관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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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한 잔을 단번에 들이켠 그녀가 볼통스레 따진다. 제법 단단하게 쥐어진 주먹이 테이블 위 깔끔하게 비워진 그녀의 맥주잔과 치킨 접시 사이의 공간에 놓여 보르르 떨린다. 그 와중에도, 앙다문 붉고 작은 입술에 묻은 하얀 맥주 거품처럼 그녀의 피부는 희고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뭘."

 치킨을 보면서 대답한다.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퉁명스러움이 바로 그의 작전이다. 눈 아끼고 입 아껴라. 놀아본 냄새 풍기는 년들은, 쉽게 보이는 순간 바로 어장관리 들어가는 거거든. 고등학교 졸업식 당일까지 데리고 자 본 여자의 숫자가 수능 점수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동시에 유일한 오점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친구로부터 저 짤막한 말씀을 하사받고자 한 달치 알바비를 오롯이 헌납한 그였기에, 그녀를 만나는 순간 미친 듯이 뛰노는 심장을 애써 갈무리하고 최대한 '어렵게' 보이고자 자꾸만 그녀를 향하는 시선과 제멋대로 귀를 향해 달려가는 입꼬리를 젖먹던 힘을 다해 억누르는 것이다.

 "깻잎."
 "......깻잎이 왜."
 "깨~~앤니~~입, 깻잎 깻잎 깻잎 깻잎 깻잎!"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연애에 대한 어느 실용서에서 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눈물이 아니라 술주정이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그의 머리를 스친다. 정확하군! 그가 내심은 어쩔 줄을 모르겠으면서도 어쩔 줄을 알겠다는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한편 가물거리는 그 연애 실용서 제목을 재구성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한 틈을 타 그녀가 깻잎을 이어나간다.

"깻잎! 깻잎! 왜, 깻잎은 안 먹는 건데!"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한 그가 대답한다. 그녀는 깻잎을 멈추고 정말 무슨 소린지 몰라? 하는 표정으로 잠시 그의 얼굴을 보며 흐려진 눈의 초점을 조절하다 실패한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포크를 들고 살인적으로 무초절임을 찍어댄다. 헐거운 조준에 무와 식초가 사방으로 튀고 결국 마지막 남은 무 한조각의 끄트머리를 찍는 데 성공한 그녀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무 한조각을 입에 넣는다.

 "너, 아까 삼겹살집에서 말야. 상추쌈만 싸더라?"
 
 포크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왠지 분한 모습으로 그녀가 말한다.

 "그게 뭐?"
 "깻잎은, 깻잎은 너한테 죄졌어? 깻잎이 너한테 막말이라도 하디?"
 "깻잎도 먹은 것 같은데."
 "상추 다섯 장에 깻잎 한 장꼴로 먹었잖아! 그것도 깻잎한테 인심 쓰듯이!"
 "다들 그러지 않나? 깻잎은 아무래도 좀 쓰잖아. 근데, 그걸 다 세고 있었냐?"
 "그, 러, 니, 까!"

 다시 포크를 들고 무초절임을 찍을 자세를 취하는 그녀. 비어 있는 접시를 보더니 누가 이 많은 걸 다 먹은 거야? 하는 표정으로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손을 들고, 아저씨 여기 무 좀 주세요. 많이 주세요! 하고 외친다. 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눈빛이 그의 얼굴을 때린다. 그는 비어 있는 그녀의 잔에 다시 맥주를 채운다.

 "그러니까, 그건 핑계야. 어차피 쌈장 찍으면 그 정도 쓴맛이야 티도 안 나는 건데."
 "그럼 너는, 사람들이 왜 상추를 선호한다고 생각하는데?"
 
 또 한 잔을 단번에 비우고 씩 웃으며 입가의 거품을 닦아 내는 그녀의 표정 속에 학생에게 좋은 질문을 받아 흐뭇해하는 선생의 표정이 녹아 있다.
 
 "사람들은 말야, 상추의 겉모습에 속았어. 아삭아삭하고 촉촉한 씹는 맛에 넘어간 거지. 사실 깻잎이 얼마나 좋아. 비타민 A, C, K에 철분은 시금치의 두 배. 식욕 부진이나 각종 성인병은 물론 암을 예방하는 효능도 있지. 깻잎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얄팍하고 까끌까끌한 촉감 탓에 깻잎을 괄시하는 거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깻잎이 얇으면 한 번에 두 장씩, 세 장씩 먹으면 되잖아. 깻잎은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먹는 사람이 원한다면."
 
 그리 또박또박하지만은 않은 발음으로 말을 마친 그녀는 또 한 잔을 채우고 바로 들이켠다. 그리고는 언제 흥분했었느냐는 듯 촉촉한 눈망울을 한 채 빈 맥주잔에 낀 물방울을 만지작거린다.

 "넌 별걸 다 알고 있구나."

 그녀의 하얀 손과 검은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느라 정신을 살짝 놓아버린 그가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고 뱉은 한 마디에 그녀는 한층 더 물기 어린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보더니 이내 다시 맥주잔으로 시선을 주며 쓰게 한번 웃는다.

 "깻잎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든." 
 
 흔들, 그녀의 어깨와 머리가 살짝 좌에서 우로 기우뚱하더니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검고 긴 그녀의 생머리는 조금 더 출렁거리다 뒤늦게 제자리를 찾는다. 

 "근데, 깻잎 여러 장을 한 번에 먹으면 엄청 쓸 것 같은데."

 무심코 뱉은 그의 말에 갑자기 그녀의 눈빛이 공격성을 띄기 시작한다. 분위기는 급변하고 잔을 쥔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아차, 꼭 다문 그녀의 입에서 그는 바보야, 멍청아, 이 병신아 따위의 말을 듣는다. 다시 그녀가 포크를 든다. 그리고는 몇 초간 무초절임 접시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포크를 던지고 빈 잔에 술을 채워 연거푸 들이켠다.
 내가 어디서부터 실수를 한 거지? 그의 마음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앉았다 일어섰다 난리를 친다. 아, 이런 병신. 말을 아끼라니까! 나가 죽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더니 호수가 그를 집어 삼켰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잔에 술을 붓는다, 술을 마신다의 연속동작을 술통이 동날 때까지 반복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다. 그는 이미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분위기는 심히 바람직하지 않다.

 "상추느~은."

 오래된 라디오 테이프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한다. 번쩍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은 왼쪽과 오른쪽의 크기가 어지간히도 다르다. 여간해서는 술로 불을 켜지 않는 그녀의 볼이 환하게 붉다.

 "상추는! 먹으면......잠이 온단 말야. 응? 알어?"
 "......어?"

 쾅, 그녀의 작은 주먹이 테이블을 친다. 그녀의 빈 맥주잔이 파르르 떨고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잠깐 그와 그녀 쪽으로 향하다 이내 되돌아간다.

 "상추! 상추 먹으면 잠오는데~ 잠오는데~ 너 자는 게 좋냐? 그렇게, 자고 싶었냐구~"
 "야. 너 왜 이래. 정신 차......"
 "자고 싶었냐고! 나랑 자고 싶었냐고 묻잖아 지그~음!"

 장내는 일순간 정적이 흐르고 손님과 종업원들은 모두 관객이 되어 그와 그녀 주연의 연극을 관람하기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은 얼굴을 터질 듯 붉히고 대사를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야, 야, 무, 무슨 소리야. 취했구나 너."

 남자 주인공은 '취했구나 너' 에 필요 이상의 악센트를 실어 관객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의도했지만 여자 주인공의 다음 대사가 너무 큰 소리로 터져나와서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땡! 땡! 땡! 틀렸어, 틀렸어! 그럴려면 깻잎을 먹었어야지~이, 깻잎 깻잎! 딸꾹, 바~아보. 깻잎을 먹어야~ 잔다 이거야~아, 딸꾹, 알아?"
 "......너무 많이 마셨네."
 "시~끄러. 잘 거야? 잘 거냐~고. 아님 조용히 해~ 나 잘 거니까. 알아?"
 "야, 안 되겠다. 일어......"
 "아아아아아아아, 시끄럽다고오~. 잘거야, 나! 너 인마, 잘해? 알았어? 딸꾹."

 그리고는 쿵. 그대로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그녀는 잠에 빠진다. 코미디와 멜로가 적당히 접붙이기 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처럼. 하지만 그녀의 머리가 테이블을 때림과 동시에 쏟아진 양념과 소금이 그녀의 머리칼에 맛깔스레 버무려진 것은 그와 그녀의 영화가 멜로보다는 코미디에 가까움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떠나는 택시의 번호판을 확인하고,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은 택시가 좌회전, 그녀의 집 방향으로 정확히 향하는 것을 지켜본다. 사거리까지 달려가서 택시가 잘 가고 있는지를 확인할까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가방에서 두툼한 수첩을 꺼내어 그녀를 태운 택시의 차량번호를 적어둔다. 그리고는 멈칫, 볼펜을 입에 물고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차량번호 아래에 조금 더 큰 글씨로 이렇게 쓰고는 밑줄을 그어대는 것이었다.


 '깻잎을 남기지 말 것'






한페이지단편소설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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