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저녁 먹고 도서관으로 가리.
- Syo, 2007


Syo는 회로이론을 강의하시는 서교수님이 무섭다. 강의 중에는 괜히 눈을 마주치지가 꺼려지고 행여나 질문이라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하기 일쑤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그가 "어떻게 대답을 해도 결국은 틀리게 되는 질문" 이라든지 "결국 어떻게든 핀잔을 줄 생각으로 말문을 여는 사람" 등을 몹시 징그러워도록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교수님의 강의가 매번 호통과 훈계로 시작하여 질책과 분통터짐으로 끝나는 데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 인생이나 학문의 선배로서 새파란 후학들 잘 되라고 말씀하시는거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그는 진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회로망이론이 영예롭게도 "the Most 부담쟁이 of 이번 학기" 상을 수상하였다. 브라보 짝짝짝. 게다가 그에게 지난학기라 함은 1년도 넘은 낡은 추억일 뿐이니, 회로망이론의 선수과목인 회로이론에 대한 지식들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결국은 1, 2학기 회로과목을 한 학기만에 통째로 집어삼켜야 하는 Syo의 부담은 등짝에 파리 날개를 달고 벼랑 끝에서 비상을 준비하는 코끼리의 심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밤도 잠들기 전까지 이면지에 열심히 회로를 그려가며 키르히호프라든지 테브낭, 라플라스의 위대한 업적을 마지못해 기리는데 여념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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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o
TAG 일기

1.

 첫째는 결코 춘향에게 수청 들기를 요구한 적이 없음이요, 둘째는 설사 본관이 그리하였더라도 관기인 춘향이 그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분명 법도를 흐리는 일이라는 것이외다. 춘향이 비록 그 아비가 사대부에 속하여 성씨 성을 받았다 하나 어미가 천기이니 그 신분이 천한 것은 국법이 정한 일이오. 또한, 춘향은 엄연히 그 이름이 기적(妓籍)에 오른 관기란 말이오. 그러니 설사 이 사람이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 하였더라도 그것은 이 나라 조선의 국법에 따라 아무런 과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오.
 공께서 이 고을에 내려와 저잣거리를 지나셨다면 분명 춘향이 내 수청 들기를 거부하였기에 하옥되었다는 풍문을 들으셨겠지요. 허나 그것은 말 좋아하는 천것들의 입에서 나온 한낱 낭설에 불과하오이다. 춘향의 죄목은 다른 것이 아니라 관기로서 점고(點考)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는 엄연히 국법을 어긴 것일진대 내 이 고을의 원(員)이 되어 어찌 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있었겠소이까.
 분명 춘향은 미색이 범상치 않을뿐더러 재주를 갖춘 기재녀임은 틀림이 없소이다. 이 사람 또한 사내대장부로 났으니 한번 그 꽃을 꺾어보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전연 없다 하지는 않겠소이다. 허나 나라님께서 내리신 남원 부사의 자리에 앉고서야 어찌 사심이 공심을 앞질렀겠소이까. 공께서 부디 저 상것들의 헛소리에 현혹되지 마시고 사대부로서 이 사람의 위신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잘 수습하여 주시기를 바라겠소이다. 공도 이 사람도 공히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오? 핫핫핫.
 참, 도읍에 계시는 영상(領相)대감께서는 어떻게, 강령하신지 모르겠소이다. 얼마 전에 사람 편에 남원에서 나는 좋은 약재를 보내드린 일이 있는데......


2.

 네, 네, 그날 밤 소인이 옥사를 지켰습죠. 분명히 옥사 밖으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요.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습죠. 천지신명님께 맹세코 절대 한눈을 판 일은 없었습니다요. 정말입니다요. 어휴. 사또께서는 이놈이 춘향이와 밤도망이라도 치려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천부당만부당입지요. 하긴, 소인 놈이 생각하기에도 칼 찬 죄인이 무슨 수가 있어서 혼자서 이 옥사를 나왔을는지, 춘향이 그것이 귀신이 아니고서야......
 그래도 참말, 참말입니다요. 되려 소인은 춘향이가 영영 이 옥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싶었는걸요. 예, 그랬습지요. 나으리는 이 고을 사람이 아니시라 모르시겠지만요, 이 고을 사내치고 양반 상것 할 것 없이 춘향이 미색에 마음자리 한번 들썩 안 해본 이는 없을 겁니다요. 가끔씩 향단이를 데리고 그네터에 가는 날이면 언덕 너머 바위 뒤에는 그 모습 훔쳐보는 사내들로 매번 장사진입지요.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 곱게 차려 입은 춘향이가 그네 구르는 모습 보고 있자면 어찌나 이놈의 가슴이 쿵쿵 내달리는지, 혹시나 그네 뛰는 춘향이가 듣고 놀라 그네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요. 아, 금박댕기 아래로 출렁거리는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그 새하얀 손은 또 어찌나 섬섬한지......에흠, 흠. 죄송하구만요.
 어쨌든 춘향이가 옥에 갇히고 난 며칠 동안 소인은 참말로 좋았습죠. 이곳은 이놈에게는 집 같은 곳 아니겠습니까요. 마치 춘향이가 이놈의 마누라라도 된 양 혼자 들떠서는 하루 종일 옥사에 붙어지냈습지요. 제발 사또께서 춘향이 옥살이를 하루라도 더 시켰으면 하고 말입니다요. 주제에 못된 맘 품은 죄를 다 받았는지 소인이 춘향이 대신 옥사에 들어앉은 꼴이 되었습니다요.
 그러나 저러나 춘향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목에 찬 칼은 또 어떻게 훌훌 풀어낸 건지. 이거야 원 참말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3.
 
 그래도 그것이 효성은 지극하였는데 어찌 이리도 독하게 감감무소식인지 모르것소. 하나 있는 딸년이 어릴 적에는 말썽 하나 없이 얌전하더니 과년하여 이리 에미 속을 썩일지 어떻게 알았겄소.
 사실 우리 춘향이는 사대부의 핏줄인데도 쇤네가 천한 기생인지라 어쩔 수 없이 기생으로 살아야했지요. 기생년 사는 게 어디 사람 사는 거라 하겄소. 이 한몸 이리 살았으면 되었지 어찌 딸년한테까지 이리 모진 삶 살라 하겄어요. 그래서 기적에는 올렸지만 양갓집 규수처럼 곱게 곱게 키웠지 않겄소. 다 부질 없는 짓이었지요. 한 번 기적에 이름 석 자 박혀버리면 그것 파내기란 대낮에 별을 따는 일인 것을.    
 얼마나 속이 탔으면 춘향이 갇혀 있는 옥에 찾아가 그냥 눈 딱 감고 변사또 수청을 들라고 했겄소. 이도령이라는 작자는 좋다고 신랑질을 할 때는 언제고, 과거보러 한양에를 간다더니 춘향이 이것이 옥에 갇혀 다 죽어가면서 수절해도 코빼기도 아니 비치니 어미된 입장이 다 그렇지 않겄소? 이도령이든 변사또든 어차피 다 양반님네들이니 천기로 옥에 갇히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않느냔 말이오. 헌데 춘향이 그 고집만 잔뜩 들어앉은 것이 수청을 들래도 절레절레, 이도령을 기다리냐고 물어도 절레절레, 그저 입은 꾹 다물고 답답허니 옥 천장만 뚫어져라 보고 앉았으니 이 속이 터지겄소, 안 터지겄소.
 이제는 다 되었소 다 필요 없으니, 아이고 나으리. 제발 제 못난 딸년 좀 찾아주시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옥사에서 도망을 쳤는지, 또 어디로 사라져서 지 에미한테 얼굴도 안 들이미는지, 딸년 둔 에미는 그대로 죄인이라더니 이렇게 하루하루 춘향이 고것이 올까봐 걱정, 안 올까봐 새까맣게 속 태우며 지내는 것도 인제는 도저히 못하겄소. 아이고, 나으리......
 


4.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었구만요. 저희 도련님께서 분명 광한루에서 춘향이와 노니는 것을 좋아라하셨지만, 정실부인이라니요. 언질조차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나으리도 생각을 해보시지요. 뼈대 있는 가문의 장손에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까지 하신 우리 도련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그런 기생년을 정실로 들어앉힌단 말입니까.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십시오. 행여나 구설에 오를까 걱정입니다.
 연정이오? 나으리께서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도련님께서는 춘향을 그저 한낱 기생으로 끼고 계셨던 것 밖에는 그 어떤 마음도 품은 적이 없으십니다. 아무렴 그렇고 말구요.
 춘향이 칼을 벗어내고 옥에서 도망 나왔다는 이야기는 향단이 편에 들었습니다만, 이쪽으로는 절대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행여, 춘향이가 우리 도련님만 믿고 예까지 왔다 해도 소인이 잡아다가 관아에 끌고 갔을 겁니다. 그러니 얼른 돌아가시지요. 우리 도련님은 지금 행차 준비로 바쁘니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5.

 쇤네가 아씨를 숨기고 있다구요? 저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걸요.
 사람들은 쇤네가 좋아서 아씨를 모신 줄로 알고 있나 본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어차피 쇤네나 춘향아씨나 똑같은 천민인데 어이해 누구는 금기서화에 호의호식하고 어이해 누구는 물동이나 지어야 하냔 말이어요. 아씨라는 말부터가 가당찮은 게 아닌가요?
 이 고을 남정네들은 춘향아씨를 그저 아리땁고 얌전한 규수로 여기고 있지요. 우스울 뿐이어요. 이제와 이야기지만 춘향아씨는 누구보다 영리하고 스스로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취기가 오를 때마다 사랑한다고, 정실부인 삼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던 이도령의 그 거품 같은 약조를 아씨는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어요. 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서 그러는 거라고 말씀은 하지만 실상은 아씨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마님의 속내도 이미 아씨는 다 알고 있었지요. 왜 옥을 나와도 집에는 연통조차 주지 않는지 쇤네는 알 것도 같아요.
 아씨가 파옥하던 날 새벽에 그네를 뛰시는 모습을 광년이가 봤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저는 믿어요. 아씨는 그네를 좋아하셨지요. 아마 아씨는 이 남원고을의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는 저 먼 곳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그네를 타셨을 거여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실 거여요. 쇤네는 오히려 그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씨한테도, 쇤네한테도 말이어요.    
 


6.

 춘향? 춘향, 춘향 언니! 나 춘향 언니 아니다. 춘향 언니 없다. 날아갔다. 나 봤다. 그네, 그네.
 그네, 타도된다 했다. 헤헤, 춘향 언니가 나도 그네 타라 했다. 그래서 해 뜨기 전에 나 그네 타러 온다. 매일 매일 온다. 슈~웅. 이렇게 탄다. 슈~웅. 발에 힘주고, 발에 힘주고 이렇게 탄다. 슈~웅. 헤헤, 춘향 언니가 가르쳐 줬다. 그네 타는 거. 줄 꼭 잡는 거 아니다. 그러면 하늘 까지 못 간다고 했다. 춘향 언니가 그랬다.
 춘향 언니 하늘까지 그네 탔다. 저~기 구름까지 간다고 했다. 헤헤, 나, 나 너무 멋있어서 좋았다. 근데 햇님! 햇님이 산에서 나왔다. 눈 부셔서 손으로 눈 막았는데, 막았는데, 갑자기 춘향 언니 없어졌다. 그네, 그네 위에 있었는데, 갑자기 휙. 근데 나 봤다. 그네가 구름까지 가서, 춘향 언니 날아갔다. 우와, 새, 새였다. 햇님 쪽으로 새, 춘향 언니 새 날아갔다.
 나 다 봤다. 나도 그네, 나도, 나도 새.



한페이지단편소설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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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여자, 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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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 신조 타케히코 감독 / 미야자키 아오이, 타마키 히로시 주연



만약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면, 죽음은 그렇게 무섭거나 슬픈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스포일러가 아주 조금(하지만 매우 중요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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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나러 갑니다 / 이치카와 다쿠지 지음, 양윤옥 옮김


사랑에 있어서, 그리고 결혼에 있어서, 아니 인생 전체에 있어서 기억이라는 것은 인간을 채색하는 은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물감이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개별적 나열이 아니라 평생을 되새김질하면서 조금씩 숙성되고 발효된다. "……기억이란, 다시 한 번 그 순간을 살아보는 거야. 머릿속에서 말이지."  농부르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마치 자신의 정수리에 무언가 글을 쓰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결국 심장이 터져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아야 할 것들이 세상에는 있겠지. 가장 소중한 것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지 않을까? 일찍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수 없이 많은 다른 미래를 포기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랑하고 싶은, 그런 이야기는 이제 소설 속에서 활자로만 남아 있는 걸까?

다시 만난 미오와 타쿠미의 사랑은 오롯이 그들의 옛 기억이다. 아름답고, 눈물의 맛이 나고, 수 십장의 편지와, 육상 트랙과, 졸업과, 기다림과 호수에서의 불꽃놀이와, 호텔에서의 키스 그리고 섹스. 13년의 길고 느린 사랑을 6주에 그대로 되박아 새기는 것은 기억의 도움이다. 그들이 만든 기억들. 미오가 타쿠미에게 전해주고, 다시 타쿠미가 미오에게 전해주는 그 기억의 주고받음 속에서 마치 커피속의 알맞게 녹은 설탕처럼 사랑이 제 맛을 내고 있다.  

결국 이 책은 사랑을 위한 기억의 소산이 된다. "아무튼 그 사람들은 지구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답을 낼 수 없었던 어려운 문제를 아카이브 별에 가서도 계속 생각하고 있어. 몇 백 년이 되도록 말야. 지구인이 기억하고 있는 한 그 사람들은 계속 생각을 할 수 있어." 남아 있는 이들은 잊지 않고 항상 #5의 문을 두드린다. 기적을 다시 한 번 만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녀도, 그들의 사랑도.

아, 기억, 그것은 그대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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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것들이 처음 부산에 나타났을 때 우리 정부가 취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뻔한 대응책이란 그것들에게 미확인생명체 'B-32'라는 그럴싸하면서 의미 없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었다. 명명 과정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던 의원들은 건강 악화와 휴양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동남아의 어느 아름다운 섬으로 날아가는 비행기표를 끊었고 비서들은 값비싼 골프채를 외제차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과연 언론은 발이 빨랐다. 부산에서 B-32의 행태를 취재하던 한 리포터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그대로 B-32의 한 끼 식사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때마침 주위를 지나던 한 학생이 그 장면을 촬영하여 UCC 계를 평정해 버렸다. 그 동영상에 제일 처음 댓글을 다는 영광은 장장 5년을 백수생활을 하던 청년실업자 김 모 군이 차지했다.

 - 앗싸 1등 ㅋㅋㅋ 근데 ㅆㅂ 저거 완전 좀빈데?

 그리하여 B-32는 비실용적인 이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새로 부여받은 이름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며 거리를 누비게 되었다. 청년실업자 김 모 군의 활약 덕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의원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귀국해 국회로 모여들었다. 언론은 연일 일어나는 참상 덕분에 기삿거리가 짭짤했고 국민은 점점 늘어만 가는 인명피해에도 침묵하고 있는 정부를 규탄했다. 정부는 지금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성명했지만 실제로는 뾰족한 수라고는 개털만큼도 없었다. 좀비라는 것들이 비상식적으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사지가 끊겨도 숨은 끊기지 않는다거나 희생자가 다시 좀비가 된다거나 하는 불공평함은 물론, 이놈들은 인간일 때의 기술을 거의 그대로 지니기까지 했다. 즉, 태권도 검은 띠는 좀비가 돼도 얼추 빨간 띠인 셈인데,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가 스나이퍼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면 어쩔 것이란 말인가. 의원들은 숙식을 국회에서 해결하면서 답 안 나오는 회의를 밤낮없이 이어나갔다. 마침내 의원들이 하나 둘 코피를 터뜨리며 쓰러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끼니마다 국회로 들어오던 중국집 배달부가 각종 보약과 건강식품을 공수하느라 무거워진 철 가방을 투덜거리기를 며칠, 드디어 역사는 이루어졌다.

"이거야!"

 짬뽕 한 그릇을 해치우고 포도 농축액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던 김 의원이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짬짜면을 먹던 의장이 물었다. 식사 중이던 국회 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김 의원 쪽에 꽂혔다. 김 의원은 희열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법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구요!"

 그리하여 김 의원은 후에 'Plan P7-2'라는 쓸데없는 이름으로 불리며 한국사에 한 획을 긋는 명 계획을 제안한 것이다. 김 의원의 열띤 설명이 끝나자 장내는 환호의 도가니로 거듭났고 감동한 의장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2.

"시오야, 홈쇼핑 좀 틀어볼래? 소리 좀 키우고."
"네, 엄마."

 우리 엄마는 홈쇼핑을 정말 좋아해요.

- ......해서 저희가 오늘 준비한 상품, 바로 '좀비고기 부위별 3종 세트'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좀비가 남편분들 정력에, 수험생 자녀분들 체력회복에 그만이라는 거 이제 모르시는 주부님들이 없으실 텐데요. 이렇게 웰빙 식품인 좀비의 단점, 바로 씹히는 맛이 부족하다는 거죠. 하지만, 이제 걱정 마세요. 이번 상품은 생전에 보디빌딩을 하던 좀비의 가슴살, 허벅지 살, 종아리 살로 구성된......

"엄마, 저거 맛있겠어요!"
"시오야, 뉴스 틀어보자."
"이이는, 지금 홈쇼핑 보는 중이잖아요."
"시오야, 뉴스."
"네, 아빠."

 아빠는 뉴스를 좋아해요. 저는 뉴스 어려워서 만화가 더 좋아요.

- ......이런 과정으로 사형수를 식용 좀비로 변화시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됨으로 인해 서민들의 식비 절감 효과가 예상됩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대선을 위한 호의 정책이 아닌지......

"아빠, 저게 무슨 말이에요?"
"음, 우리 시오 좀비 많이 먹으라고 가격을 낮춰준대요."
"정말?"
"그럼."
"와! 신난다!"
"응? 그렇게 좋아?"
"응! 나는 좀비가 제일 맛있어요!"
"허허허, 그래. 우리 시오, 좀비 많이 먹고 얼른 쑥쑥 자라렴."

헤헤헤, 우리 가족은 너무 행복하답니다.

그렇죠?




한페이지단편소설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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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o


"먹어버리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때가 가끔 있지. 대상은 대개 여자들이고."
"먹는다는 건, 그……섹스를 말하는 건가요?"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오빠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박장대소하는 게 아니겠어요? 얼굴이 금세 화끈 달아올랐어요. '섹스'라는 건 여자 중학생이 교복까지 입고서 입에 올리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단어거든요.

"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발라당 까졌구나?"
"그, 그럼 뭔데요!"
"'먹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먹다'."
"사람을요?"
"사람을."
"이빨로 씹어서요?"
"물론, 이빨로 씹어서."

 우리 오빠는 미소가 너무 매력적이에요. 가끔 사람을 이빨로 씹어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짓는 미소도 이렇게 멋지니까 말 다한 거죠, 뭐. 하지만, 오늘따라 내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이 못내 찝찝하네요. 혹시 돼지들 도축하기 전에 털도 빗겨주고 그러나요?

"그럼 나도 잡아먹을 예정이에요?"
"나 '도'라니 아가씨, 난 아직 아무도 먹은 적이 없다고. 그리고 넌 그렇게 맛있어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아."
"내가 왜요! 오빠가 몰라서 그렇지, 나도 나름 맛있는 여자라구요!"

 왠지 억울하고 그냥 가만있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 같아서 와락 하고 덤벼들었어요. 언젠가 너는 가슴이 비교적 작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참담해요. 고기반찬에 둘러싸인 외로운 무말랭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랄까요.

"것 참. 발끈하기는. 그래, 그래. 너도 맛있는 여자야. 음, 귀여운 딸기 맛이나 앵두 맛 정도랄까? 근데 나는 과일 맛보다는……이를테면 술 맛을 더 좋아하는 편이거든."
"술 맛이요? 술 맛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 알았다 싶었는데 저만치 먼 데로 가 있는 사람. 처음에는 먼 곳이라고 생각하게 해 놓고 나중에서야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람. 그래서 손을 뻗어보면 이미 흔적도 없이 유유히 사라져 버리는 사람. 찾을라치면 어디에도 없다가 문득 비 오는 밤이면 머릿속을 온통 휘저어 놓고는 해서 자기를 찾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애초에 꿀꺽 삼켜버리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 턱이 없잖아요-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처음 보는 오빠의 진지한 모습이 너무 경이로운 나머지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네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멋있잖아요. 시인 같아요, 우리 오빠. 이러니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미 툭 튀어나왔던 내 입술은 쏙 들어갔고 언짢았던 기분도 간데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바로 해실거리면 내가 얼마나 쉬운 여자로 보이겠어요.

"몰라요. 어쨌든 오빠는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허, 이거, 우리 아가씨 삐친 것 같은데?"
"됐어요. 집에 다 왔으니까 인제 그만 가요. 꼴도 보기 싫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고개를 획 돌렸는데, 살짝 곁눈질을 해 보니까 오빠는 다 알겠다는 듯이 웃고 있네요.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는데? 그럼 화 풀리겠지?"
"술이나 사 줘 봐요. 얼마나 맛있길래 그러는지 한 번 먹어나 보게."
"하하하, 톡 쏘는 맛이 있는 아가씨라니까, 정말."
"얼른 가라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잘 자고 내일 보자."

 오빠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휘파람을 불며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돌아가고 있어요. 아직은 어렵고 알 수 없는 사람이지만 중학생의 첫사랑 상대로는 어디 더할 데가 있겠어요? 아, 조금씩 작아지며 어둠 속에 스미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배가 고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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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o

[20070809]

Chronicler 2007/08/19 23:25


 게으르니즘의 영정에 향을 사르며.

 귀찮은게 귀찮아지고 게으름을 피우는데 게을러져서 창작은 커녕 사고 자체를 꽁꽁 묶어둔 채로 지냈다. 자유로운 청춘을 각종 패기넘치는 시도들과 시행착오들과 시와 시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저 빈둥거림으로 마감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이제 그간의 무수한 성공과 실패들과는 무관하게 또 하나의 Chapter가 어쨌든 막을 내린 것이다. Game Over. New game is coming. Get Ready Plz.....

 어쩌면 그 짧지 않은 시간들을 나는 더 충실한 독서로 채색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육체가 아닌 정신, 방황이 아닌 방랑을 위해 스스로를 태워나갈 수는 없었던 걸까? 술 한병에 녹아버려 두 병째에는 더 할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은 인생을 당첨되지 않은 복권처럼 움켜쥐고 빈 손, 텅 빈 머리, 텅텅 빈 가슴으로 살아왔다는 것과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지도 모를일이라는 것이 두렵다. 허탕친 낚시꾼은 어탁이 두렵다. 각설하고,

 어쨌든 내 표류의 마지막 일요일을 기리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술 대신 500ml콜라와 안주 대신 1100원짜리 프링글스를 샀다. 으적으적 씹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안녕, 겨우 500ml 만큼만 달달했던 나의 치기
氣와 결국은 Zero Calorie- 아직도 출발선에 선 나의 스물 두 해야. 내겐 기어코 1100원어치만 짭짤해야 했니 이 미운 역마살아. 그 째째한 풍미야.

 편의점에서는 구매할 수 없는 삶을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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