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18]

Chronicler 2008/07/18 16:40

1. 초점 없는 체 게바라와의 눈싸움

사과대 건물 앞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전단을 돌리고 있었다. 그 전단을 받아들면 자기네 신문을 구독하는 것이 어떤가를 물어보는 식인데, 며칠 전에 그냥 신문을 나눠주는 줄 알고 덥썩 전단을 받았다가 결국 손사래를 치고 돌아선 기억이 나서 오늘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로 했다. 그러는데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아가씨에게 전단을 들고 슬금슬금 접근하는 남자의 티셔츠 등에 근엄한 표정의 체가 올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굽신거리며 아가씨에게 전단을 건냈고 아가씨는 전단을 받아들었다. 뒤이어 남자는 아마도 며칠 전 내가 들었던 식의 멘트로 구독을 권유하는 듯했다. 아가씨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체는 여전히 입술을 꼭 다문 표정으로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체를 모른다. 나는 그 신문에 대해서도 별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신문 구독과 체. 아무래도 그건.



2. 최고의 다리를 만났을 때

그러고는 88계단을 내려오는 데, 20m 전방에 다리가 장난이 아닌 아가씨가 한마당을 가로질러 구두 수선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길고 잘 빠진 다리를 TV 밖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 계단을 내려가는 내 시선은 그저 그녀의 다리에만 꽂혀있었다. 정말 최고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고귀한 다리였기 때문에, 그 다리를 하염없이 보고 있는 내 자신이 결코 부끄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로 계단을 반쯤 내려오자 서점 쪽에서 나오고 있는 -아마도 공대생으로 보이는- 일단의 남성군단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그녀와 나 사이를 통과하며 스쳐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일곱 명 가량의 남자들이 하던 이야기는 계속 하면서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이윽고 처절한 부끄러움에 남몰래 치를 떨었다.



3. 여긴 이미 미쿡인가

집에 돌아오자 마자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비어 있는 옆방에 웬 아낙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상타 하고는 방에 들어와 낮잠을 청하는데 주인집 큰 딸이 친구들을 아주 그냥 떼로 데리고 와서 거실을 점령, 뻑적지근하게 노신다. 옆방에서는 각종 술 게임들이 벌어지고 있고 부엌에서는 누군지 몰라도 계속 요리를 하고 있다. 대낮부터 녹색 술병이 바닥에 나뒹군다. 몇몇 아가씨들은 엉엉 우시기도 한다. 문을 열어보니 사내놈 1人이 머리를 화장실 쪽으로 향한 채 대자로 뻗어서 머리맡에 앉아 있는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고 있다. 내가 문을 열어서 저를 내려다 봐도 기척도 못 느낀다. 아가씨 1人은 화장실 문 옆에 있는 키낮은 신발장 위에 엎드린 시체가 되어 있다. '허'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한 번 웃었더니 사내놈 비틀대며 일어서서 옥상으로 올라가면서 것참 우렁차게도 씨발을 외친다. 오늘 방학식이라, 한 번만 봐 주세요, 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용서를 구하는 아가씨도 있다. 그러나 지금도 옥상에서는 "야~ 개새끼야~ 하지 마아~♡" 하는 어느 아가씨의 새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려 그려, 방학도 했겠다 알딸딸도 하시겠다, 내 봤을 때 저 친구들 중 최소 한 쌍은 오늘 반드시 잔다.
그리고 주인집 딸내미와 오늘 방학한 그녀의 수많은 남녀 혼성 동무들은 현재 중학교 2학년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Chronicl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0718]  (0) 2008/07/18
[20080714]  (0) 2008/07/14
[20080703]  (4) 2008/07/03
[20080702]  (0) 2008/07/02
[20080701]  (0) 2008/07/01
[20080622]  (0) 2008/06/23
Posted by Syo
TAG